예레미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테네브레이….”
예레미아는 잠시 깊이 생각에 빠졌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마리크 주교와 테네브레이를 막으시려는 거죠?”
막으려는 게 아니라 마리크 주교가 선 시비를 걸었지. 쌍둥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예레미아는 잠시 침묵했다가 큰 결심을 내린 후 입을 열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예레미아 님.”
가브리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대답했다.
지금 예레미아의 몸은 아자젤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가브리엘과 몹시 닮아 보였다. 같은 핏줄이라 어쩔 수 없는 걸까?
갑자기 머릿속에 전구가 켜졌다.
그러고 보니 가브리엘은 사실 황족이잖아? 게다가 그냥 황족이 아닌, 무려 잘생긴 금발 황손인 오라토리오를 제친 계승 서열 1위 황족이다. 그리고 우린 앞으로 마리크 주교-테네브레이랑 싸우는 거고. 그럼 의도치 않게 황위를 두고 싸우는 거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내용이 진행될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이 소설 결말은 가브리엘이 황제가 되면서 끝나나 보다.
***
가브리엘이랑 예레미아와 같이 상황 정리를 끝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한 후 감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행히 아직 교대하지 않았는지 안테 경은 내 드레스를 입고 침대 위에 얼굴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푸딩은 아자젤을 상대하면서 광범위 마법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해 버린 탓인지 다시 고양이 모습으로 돌아가 내 품에 안겨 있었는데 안테 경이 침대 위를 차지한 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할퀴려 들길래 열심히 말렸다.
“푸딩. 착하지?”
우리 푸딩이 봐주자, 안테 경이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줬는데 한 번만 봐주자. 살살 쓰다듬어 주자 푸딩이 만족하며 발톱을 집어넣었다.
“안테 경.”
“로한슨 영애님! 오셨군요!”
안테 경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들었다. 외간 여자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 누워 있던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드레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사이에 누가 왔나요?”
“네. 감시 인원이 몇… 아, 드레스를 멋대로 입어 죄송합니다. 그게, 지하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기에 급하게 챙겨입었습니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더 수치스러워할 것 같아서 참고 말을 돌렸다.
“들키진 않았고요?”
“네, 네. 다른 기사들이 잠깐 확인차 들렸는데 그냥 잔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나가더군요.”
휴. 다행이네. 안테 경이랑 내 체격이 크게 다르지 않아 대역이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저건 괜찮았나요?”
감옥 바깥에 안테 경을 괴롭혔던 폭력 깡패 기사가 서 있는데 혹시 내가 없다고 보복이라도 한 건 아닐까 싶어 걱정돼서 물었더니 안테 경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전 사람 같더군요.”
인성 내다 버린 깡패였는데, 이제 사람 다 됐나 보네. 이왕 사람 된 김에 사내 폭력 근절 캠페인이라도 해 볼까? 완전 성황리에 마무리될 것 같은데.
“그래서 로한슨 영애님. 일은 어떻게…, 테네브레이 님은 찾으셨습니까?”
“네. 찾았어요.”
아. 안테 경이랑 다른 사람들은 테네브레이랑 예레미아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겠구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직 안테 경을 온전히 신뢰해도 되는가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굳이 알려 줬다가 마리크 주교한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흘러 들어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고.
“…손은 어쩌다 다치셨습니까?”
안테 경이 붕대가 칭칭 감긴 내 손을 보고 귀신 보듯 놀랐다. 나갔다가 다쳐왔으니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되긴 하겠지. 감동한 나머지 그만 전후 사정을 전부 얘기해 줄 뻔했다. 입 잘 지켜야지.
“검을 다루다가 그만 실수를 해버려서요.”
아자젤이 푸딩을 공격하려 해서 막았다는 이야기를 잘 생략해서 전달했다. 핵심은 칼 맞았다는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아, 그리고 곧 테네브레이 님이 서거하셨다는 소식이 들릴 거에요.”
미리 알고 있으라고 귀띔해 주자 안테 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 검을…. 분, 분명 테네브레이 님을 사살하는 데 동참하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설마 내가 테네브레이를 쓱싹하고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감동 돌려줘.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안테 경도 세간에 도는 내 소문을 여럿 주워들었나 보네.
가브리엘한테 들어보니까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이에 수위가 훨씬 세졌더라. 실제로 흑막은 마리크 주교인데 소문만 들어보면 내가 황녀를 조종하고 주술 서를 퍼트려 이단을 창궐하고 악마를 조종한다고 난리더라.
대체 맞는 게 하나도 없어. 마리크 주교가 날 정말 악의 축으로 만들려고 작정하고 말을 흘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물론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해명했다. 아직 나랑 안테 경 사이에는 신뢰가 부족하긴 하네. 끈끈히 엮인 다른 사람들은 보통 내 도움을 받았지만, 안테 경이랑은 철저히 주고받기 관계에 불과하니까.
아, 이제야 생각났는데 가브리엘한테 안테 경 이야기 하는 거 깜빡했다. 근데 지금은 한창 마리크 주교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시기인 것 같으니 일이 마무리되고 말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뭔가 안테 경을 이용만 해 먹은 것 같아서 찝찝하네. 다음에 꼭 가브리엘한테 인재가 있다고 전해야지. 안테 경도 인맥 빨로 성기사 특진해 보자! 망할 신분제 사회 라인 잘 타서 즐기기라도 해야지.
“들키지 않았으니 안심하시고요.”
내가 감옥 밖에 잠깐 나갔다가 온다니까 안테 경이 벌벌 떨면서 기사들한테 들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게 생각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참 다행이죠?”
“네, 네. 그렇습니다.”
안테 경도 안심한 모양이다.
“안테 경. 이거 받으세요.”
“…성수?”
비록 에반젤린의 몸은 저주받아서 성수가 들지 않지만, 비상용으로 갖추는 게 좋을 것 같아 로한슨 저택에 간 김에 몇 병 가져왔다. 가브리엘 다치거나 우리 애들 다쳤을 때 써야지. 챙기는 김에 안테 경이 깡패 기사한테 맞아서 다리를 절던 걸 떠올리고 챙겨 줘야지 생각했다.
“다리를 그 상태로 오래 두면 안 좋을 테니까요.”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로한슨 영애님.”
안테 경이 압도적 감사를 선보이며 성수 병을 받았다. 너무 송구해 보이는데, 다 기브앤 테이크 인 거 알죠. 안테 경? 그냥 적선으로 주는 거 아니고 나 대신 감옥에 갇혀 있던 값이다.
안테 경은 곧바로 성수를 마셨다. 효과 한번 끝내주네. 그 작은 병 하나 마셨다고 안테 경의 망가졌던 다리는 금세 멀쩡해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한동안 계속 다리를 저는 게 낫겠어요.”
안 그래도 나랑 내통한다고 욕먹나 보던데 갑자기 다친 상처가 회복했다고 하면 쐐기를 박는 셈이니까. 안테 경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있어 교대시간이 되었는지 지하로 다른 기사들이 내려왔다. 안테 경은 드레스를 벗고 밖에서 모른 척 서 있다가 나가면서 내게 눈인사를 했다.
안테 경이 나가고 푸딩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보이면 안 되니까 저택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가기 싫다고 애교를 부리는 푸딩을 보니 마음이 약해질 뻔했으나, 간신히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며 다시 한번 가라고 했다. 푸딩은 새침하게 내 손을 아프지 않게 깨물더니 슉 사라졌다. 이제 혼자 남았네. 지쳐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예레미아 찾아다니고, 아자젤이랑 싸우고, 주술진의 진실도 알아 버리고, 가브리엘이랑 미래 계획도 세우고 오늘 너무 바쁘게 지냈다.
피곤해서 눈꺼풀이 자꾸 내리 감겼다. 자고 일어나면 온 황성에 테네브레이가 사살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겠지….
***
에반젤린은 우선 감옥으로 돌아갔다. 감옥을 지키는 기사들의 교대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금 감옥을 지키는 기사는 이미 에반젤린의 수중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에반젤린은 감옥에 있는 사이 연락할 일이 필요하다면 안테노르 나인이라는 기사를 찾아 말을 전하면 된다 전했다.
가브리엘이 그 이름을 머리에 새겨넣는 사이 예레미아는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며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레미아의 시신은 황제에게 양도하기로 미리 이야기됐다. 마리크 주교가 세운 계획대로라면 예레미아는 아자젤의 몸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아자젤에게 살해당했어야 했다. 마리크 주교가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가브리엘과 예레미아는 그 계획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예레미아 님. 제 의견에 따라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브리엘이 예레미아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미 다른 몸으로 영혼을 옮겼다고 해도 평생을 살아온 몸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예레미아는 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절 구해 주셨으니 은혜를 갚는 것뿐이에요.”
다시 저 몸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면 조금이라도 에반젤린과 가브리엘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나았다. 예레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시체를 보게 된다니 참으로 기이한 순간이 아닐까.
남의 몸으로 보니 정말 테네브레이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목걸이까지 검으니 테네브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아, 생각해 보니 예레미아의 시신은 테네브레이라고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자신의 시신을 바라보는 예레미아의 눈빛에서 미련이 뚝뚝 넘쳐 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푸딩이 딴지를 걸었다.
“아스타로트는 그런 감상적인 얼굴 안 해.”
젤리 역시 킬킬대며 말을 얹었다.
“맞아. 그 새끼는 기본적으로 재수 없음이 깔려있어야 해.”
“아스타로트는 쾌락주의자고 인내심도 무척 짧지.”
“자기는 비린내를 풍기는 주제에 냄새에 취약한 것도 우습지.”
푸딩과 젤리가 번갈아 가며 아자젤의 설명을 빙자한 험담을 내뱉었다. 예레미아는 자신도 싫어하는 아자젤의 험담을 함께 즐겨야 하는지 아니면 앞으로 그 싫어하는 아자젤의 몸을 빌려 살아야 하니 이 험담에 기분 나빠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타르트야. 똑바로 하자.”
젤리가 괴상한 별명으로 부르자 예레미아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그 타르트라는 별칭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아자젤 아스타로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에반젤린 님의 작명법인데? 왜, 별로야?”
젤리가 입술을 비쭉이며 뻔뻔하게 물었다. 어쩐지, 이름이 푸딩에 젤리라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로한슨 영애는 이름을 꽤 독특하게 지으시는군. 예레미아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요. 아주 마음에 들어서요.”
“저 녀석은 머랭이야. 머랭보단 타르트가 낫지?”
둘 다 별로였다. 에반젤린의 작명이라는 말에 불만을 토할 수 없는 에레미아가 분한지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건 입술을 꽉 깨문 아자젤이라서, 젤리와 푸딩은 아자젤의 표정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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