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처음에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 하는 듯했다가 내가 ‘칸나.’ 하고 이름을 부르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칸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왔다.
“아가씨,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칸나는 나보다 키가 작았다. 품에 안겨 들썩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칸나를 본 지 무척 오래되긴 했다. 내게 숨 쉬듯이 주어졌던 애정이 한동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자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이제 아예 완벽하게 나오신 건가요?”
“아니. 그냥 잠깐 빠져나온 거야. 환자가 있으니 침대에 눕혀야겠어. 도와줄래?”
“환자요? 어…. 가브리엘 경.”
칸나는 내가 군식구를 데려온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가브리엘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칸나는 예레미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침대를 정리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내게 양해를 구하며 예레미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 흰 침대보는 예레미아가 쏟아내는 피로 인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상처가 심각하네요. 열도 심하고요…. 아가씨, 이분은 누구신가요?”
“예레미아 황녀님이야.”
칸나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황녀님이요…? 황녀님이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치셔서….”
칸나는 뒷말을 흐렸다. 다친 예레미아를 왜 로한슨 저택으로 데려왔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자초지종을 캐묻는 대신 예레미아를 간호하는 것을 택했다. 크으. 우리 칸나는 배려심도 끝내주네.
칸나가 물수건을 가지러 가자 방에 남은 건 기절한 예레미아와 가브리엘뿐이었다. 가브리엘은 아직도 예레미아와 맞잡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다치셨군요.”
가브리엘이 내 상처를 눈치챘다. 사실 내가 엄살을 부린 거지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누굴 걱정하는 거래.
“다친 손으로 계속 손을 잡아 주고 계셨던 겁니까?”
손을 잡은 건 예레미아였다. 난 그냥 놔뒀을 뿐이다. 가브리엘은 예레미아의 손을 내게서 떼어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잃어버린 내 손을 파헤치듯이 바라보았다.
“제가 감히… 손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손을 내친 이후로 가브리엘은 멋대로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괜히 양심이 푹푹 찔려 얌전히 가브리엘에게 손을 내주었다. 가브리엘은 내가 예레미아처럼 치명상을 입었다는 양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푸딩처럼 상처를 핥지는 못했다. 벌벌 떨리는 손은 환부에 자극이 가지 않게 아주 멀리 손끝을, 손등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가브리엘이 날 걱정하는 게 피부로 와 닿아 몹시 간지러웠다.
“이런 식으로…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가브리엘이 침잠했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감옥에서 면회를 안 받아 줘서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가 다쳐서 나타나니 서글퍼하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걸 봐서 좋은데 다쳐서 슬프다는 거겠지?
“그래도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니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나요?”
“저는….”
무언가 망설이며 말끝을 흐리던 가브리엘은 결심이 섰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제 다짐했습니다. 에반젤린 당신이 설령 죽은 시체라고 해도 손을 놓지 않겠다고요.”
어…. 뭔가 굉장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죽어도 시체를 데리고 살 셈이야? 아무래도 무심 남주에서 시체를 끌어안고 사는 피폐 남주로 키워드를 갈아 끼운 것 같았다. 저번에 집착의 기미가 보이던 게 내 어림짐작이 아니었나 보다. 신실한 성기사는 어디 갔는데…?
설마 내가 가브리엘을 매몰차게 대한 게 악영향을 끼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었겠어. 그렇고말고. 이건 장르가 잘못한 거다.
“서둘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아 님의 일을 끝내고 나서요.”
나는 손이 찢어진 게 전부였으니 성수가 아니더라도 의사를 부르는 거로 충분할 거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걸 깨달았다. 푸딩과 젤리는 날 그토록 챙기는 주제에 상처를 치료하자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나 날 걱정하면서 왜 치료하자는 말은 안 할 걸까? 걱정은 진심인 것 같았는데….
깊게 파고들기도 전에 칸나가 돌아왔다. 가브리엘은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공유했고 칸나는 기껏 그친 눈물을 다시 펑펑 흘렸다. 둘 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지?
큰 상처는 아니라며 칸나를 진정시키는 사이 젤리가 멜렉을 데리고 돌아왔다. 가브리엘이 같이 있다는 걸 신경 썼는지 라이더의 몸이 아니라 눈을 가리고 있는 원래 멜렉의 모습이었다.
“에반젤린 님, 부르셨다고 해서…. 우욱.”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멜렉이 헛구역질했다.
“죄송합니다…. 피 냄새가 나서….”
“참아.”
젤리가 구역질하는 멜렉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젤리는 멜렉을 강하게 키웠다. 오죽하면 처음에 젤리랑 푸딩한테 반말했던 멜렉이 알아서 몸을 수그리고 한 수 접어 줄까.
“멜렉, 네가 처음 다른 몸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해?”
“제가 이 몸으로 들어온 순간이요…?”
멜렉이 가브리엘의 눈치를 살피며 이걸 말해도 되냐는 듯 망설였다. 가브리엘은 애초에 내가 빙의자인 걸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난 멜렉처럼 예레미아를 다른 몸에 빙의시킬 속셈이었다. 젤리는 예레미아의 몸이 가망이 없다고 했으니 다른 몸을 찾으면 그만이다.
“음….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그 당시의 기억이 희미해서 뚜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아요.”
멜렉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좋게 말해 빙의지, 사실 멜렉이 죽었던 순간을 다시 말해달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었다. 멜렉에게는 무척 끔찍한 기억일 것이다. 멜렉에게 좀 미안한데…. 하지만 나는 그냥 눈 떴더니 빙의 완료된 사람이고 내가 직접 몸을 골라 빙의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의지할 구석이라고는 멜렉의 경험뿐이니 어쩔 수 없지.
멜렉의 사기를 증진할 방법은 아주 뻔했다.
“여자아이가 죽어 가고 있어. 이 몸으로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니 다른 방법으로라도 살리고 싶어.”
“저처럼요?”
“그래. 그러니 당시의 환경, 네가 겪은 상황, 어떻게 죽고 다시 깨어날 수 있었는지 기억나는 걸 전부 말해 줘.”
멜렉은 너무 마음이 여렸기에 상처를 파헤쳐 남을 도울 방법을 찾아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멜렉이 자신의 과거를 다시 토해 냈다. 악마 같은 사람과 원장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지하실에 가두고 학대했다는 것. 어느 날부터 원장은 지하실에 발걸음을 끊었고, 아이들이 아사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이가 멜렉이라는 것까지.
나는 다시금 이야기를 들으며 멜렉이 수인에게 빙의한 것을 떠나 왜 그토록 피를 싫어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기아가 심한 곳에서는 죽은 사람을 뜯어먹기도 한다고 했다. 멜렉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고기 취급하지 않았으니 수인에 빙의되어도 피와 고기를 멀리할 수밖에.
멜렉의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너무 비참하고 참혹하여 그 입에서 다시 기억을 꺼내어 내뱉게 한 내가 쓰레기 같았다. 역시 악녀라서 그런지 선한 의도로 행동해도 남을 괴롭히게 되는 것 같네…. 그러나 수확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멜렉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지 못했다면 더 미안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젤리가 꺼낸 말에 가브리엘이 눈을 빛냈다.
“젤리 씨. 부디 알려 주세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왜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그냥 순순히 설명해 주면 우리 젤리가 아니지. 상황이 심각한데 장난을 치는 걸 훈계할 생각이었는데 가브리엘이 선수를 쳤다.
“에반젤린 영애가 그것을 바라시니까요.”
“영악한 놈.”
젤리가 혀를 차며 가브리엘을 비꼬았지만 사실 내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기사는 어디 가고…. 부디 가브리엘이 저렇게 된 게 내 탓은 아니기를 빈다.
젤리는 설명을 해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가브리엘을 노려봤다. 지금 예레미아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갑자기 무슨 기 싸움을 하고 그러니….
“말하기 전에 너한테 확답을 받아야겠어. 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주인님의 곁에 남아 있을 거야? 난 태양신한테 사랑받고 자라난 자식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혹시 알아? 다음번에는 네가 우리 주인님을 불로 태우려 들지.”
가브리엘이 성기사라는 걸 꼬집는 건가? 하기야…. 젤리가 저렇게 날을 세우는 것도 이해는 갔다. 가브리엘이 여태 나를 두둔하던 걸 그만두고 태도를 바꾸며 모든 사실을 고해바친다면 그때는 정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지도 몰랐다.
가브리엘은 젤리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시선의 끝자락이 내게 향해 있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태양 빛이 제게 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푸른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가브리엘의 푸름이 하늘이 아니라 깊은 물 속이라면 햇빛이 닿은 적 없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젤리가 무어라 트집을 잡기 전에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하고 서두르자. 젤리, 어서 설명해 줄래?”
젤리는 내가 가브리엘의 편을 들어준 것이 못마땅한지 잔뜩 삐졌으면서도 짐작해 낸 정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고아원의 지하실은 멜렉의 희생양을 모아 놓은 곳이에요.”
“저요?”
“너 말고, 원래 멜렉 말이야.”
젤리의 구박에 멜렉은 바로 의기소침해졌다.
“멜렉은 이 순한 놈과는 다르게 역겨운 놈이었거든요? 뭐, 우리 같은 놈 중에서 역겹지 않은 걸 찾아보기가 더 드물긴 하겠지만요.”
젤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멜렉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즐겼거든요. 특히 어린애들을, 그러니까 고아원 원장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고아원 애들을 가지고 논 거죠. 그러는 중에 원장이 발길을 끊었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어요.”
가브리엘이 짐작이 간다는 듯 말을 얹었다.
“아이노아 고아원의 원장이 이교의 무리로 간주하여 처형된 기록이 있었습니다.”
20년 전의 이교도 학살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젤리는 심드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 뭐, 그런 이유로 발길을 끊었겠지. 자신에게 장난감을 제공해 주던 인간이 죽으니 멜렉이 상황을 파악하려 다시 고아원을 찾았을 거고 거기엔 다 죽고 한 아이만 남아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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