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는 내 손을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상처를 의식한 게 분명했다. 네가 그러면 더 아프거든? 원래 상처는 의식하지 않는 게 제일 덜 아픈 법이다.
“많이 아프세요?”
“괜찮아. 성수라도 바르지 뭐.”
“하하, 농담도 참 무섭게 하시네요.”
젤리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하냐며 나를 질책했다. 뭐지? 농담 아닌데?
의아해하다가 불현듯 에반젤린이 병약해서 죽었다는 걸 떠올렸다. 처음 눈을 뜬 게 관 속인데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꺼내질 않으니 가끔 잊고 만다. 그러네. 에반젤린도 라이더처럼 성수가 통하지 않는 쪽이었지.
근데 백작은 빙의하고 나서 왜 그렇게 내게 성수를 많이 먹였던 거지? 빙의 초반에는 그냥 에반젤린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쓰레기 같은 백작이 딸을 그렇게 챙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친부니까 에반젤린이 성수의 효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거다. 토텐 부인처럼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 것도 아니고…. 설마 마리크 주교처럼 날 악귀 취급한 건가? 딸 몸을 빼앗았으니 그런 취급을 당해도 싸긴 한데, 적어도 백작은 그러면 안 되지. 백작 부인한테는 욕먹어도 상관없지만.
“주인님. 황녀를 찾았어요.”
한참 뜸을 들이던 젤리가 황녀를 찾은 것 같았다.
“피 냄새가 유독 진하게 나는 걸 보면 정말 아스타로트 놈 말대로 죽기 직전인 것 같아요.”
젤리가 상황을 알렸다. 성수라도 있었으면 바로 치료했을 텐데 감옥에서 탈출한 처지에 성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젤리가 손을 튕기자 시야가 확 바뀌었다. 진짜 순간 이동은 개사기 능력이다. 이동한 곳 역시 같은 숲속이었다. 주변 풍경이 똑같아서 얼마나 멀리 이동했는지 짐작은 가지 않았다.
“이런.”
젤리가 영혼 없이 침음했다. 이번에는 황녀를 제대로 잘 찾아왔다. 문제는 가브리엘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나?
안 그래도 아자젤이 한번 찔렀는데 거기다 가브리엘이 확인 사살을 해 버린 건 아니겠지…? 걔는 네 조카야! 게다가 뒷공작에 휘말린 가짜 범인일 확률이 높으니 황명 따위는 집어치우고 절대 죽이면 안 돼!
가브리엘을 막으려고 가까이 가자 바닥에 말캉한 게 밟혔다. 발을 치우자 그 밑에 사람이 뻗어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서 이 자리에서 빙의 끝내고 성불할 뻔했다.
바닥에는 기사들이 여럿 쓰러져 있었는데 날 잡아 감옥에 가둔 기사들이랑 옷차림이 같았다. 그러니까 황궁 기사단이라는 말이었다. 다 죽어 가는 황녀가 기사들을 이길 리 없으니 이건 가브리엘이 한 짓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기사들은 죽은 게 아니라 그냥 기절한 것뿐이겠구나. 성기사는 원래 아무나 죽이고 그러면 안 된다. 가브리엘도 황녀를 구하느라 기사들을 제압한 거겠지?
가브리엘은 처음부터 황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나도 상황 파악을 했는데 남주인 가브리엘이 못 했을 리 없었다. 어쩌면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럼 나는 괜히 개고생한 건가? 아니지. 사람 하나 살리는 건데 이 정도 고생쯤이야.
내가 물컹한 사람을 밟고 놀라서 멈칫한 사이에 젤리는 가브리엘 쪽으로 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가까이 갔다.
“…로한슨 영애.”
“네, 경. 부르셨나요?”
가브리엘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내 기척을 느낀 건가? 발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거야? 남주다운 능력이다.
“에반젤린.”
“네. 가브리엘 경.”
가브리엘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였다. 왜 먼저 불러 놓고 놀라는 거래. 설마 자기도 발소리만 듣고 나를 알아맞힐 줄 몰랐던 걸까?
아, 그게 아니구나.
가브리엘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물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늘 푸른 하늘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넘실거리는 게 그냥 호수였다. 누가 멋대로 하늘빛을 반사해서 남을 오해하게 하래.
“부디… 황녀님을 살려 주십시오.”
가브리엘이 나를 간절히 올려다봤다. 나는 이런 시선을 여러 차례 받아 본 적이 있었다. 칸나를 구했을 때, 데이지가 돌아왔을 때, 고아원 아이들이 매달릴 때, 토텐 부인이 나를 찾아왔을 때, 가브리엘은 그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단 한 번도 그들을 내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악녀에게 주어진 참혹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냥 변덕일 수도 있었다. 얼마나 의지할 곳이 없으면 세상을 종잇조각처럼 여기는 나에게 매달리나 싶어 안타까워서 그럴 수도 있고.
“경이 바라신다면요.”
지금의 가브리엘은 툭 찌르면 넘칠 거라는 걸 알아서 나는 위로하듯이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가브리엘은 한시름 놓은 듯 희미하게 웃었다. 울지 말라니까 눈에서 차오른 것이 넘쳐 밖으로 툭 흘러나왔다. 딱 한 줄기, 한 방울이라 가브리엘은 자신이 운다는 것도 모를 터였다.
우는 모습을 더 보기 싫어 눈을 돌렸다. 어장 관리라면서 가브리엘이 운다고 절절매는 나도 참 쉬운 사람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그걸 알아주는 건 칸나뿐이긴 했다. 악녀라는 꼬리표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칸나가 ‘아가씨는 다정해.’ 염불을 외워도 아무도 안 믿더라. 아, 푸딩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곤 했다. 그러니 내가 둘을 편애할 수밖에.
슬쩍 보이는 황녀의 상태가 심각했다. 바닥에 축 늘어져 겨우 숨만 헐떡이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옆구리를 정통으로 찔린 것인지 그 부분의 옷감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옷을 찢어 환부를 살폈다. 상처가 너무 깊었다. 아자젤 이 쓰레기 자식.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이제 보니 중2병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이었다.
“성수는?”
“소용없습니다. 젤리 씨가 통하지 않는다고….”
바닥에 화려하게 세공된 병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바닥에 부딪혔는지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황녀도 성수가 통하지 않는 저주받은 체질인 건가? 젤리는 가브리엘이 울든, 황녀가 다 죽어가든 관심 없다는 듯이 성수 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성 없게 유리 조각에 찔렸는지 손가락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어댔다.
옆에서 황녀는 죽어가고 있는데 고작 유리 조각에 좀 찔렸다고 아프다고 난리였다. 안 그래도 상황이 복잡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골치 아파 죽겠는데 엄살 부리는 걸 보니 젤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성수가 묻어 있으니 바로 아물었을 텐데 하여간에 엄살은….
그 소란에 정신이 들었는지 황녀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날 바라봤다.
“천사…?”
죽으면 저승사자가 아니라 천사가 모시러 오는 세계관이라 그런지 이곳에서 자주 들어온 얘기였다. 그나저나 헛것을 보는 걸 보니 정말 심각하긴 한가 보네…. 이러다 치료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저승으로 떠날 것 같아서 이름을 부르며 정신을 차리라 했다.
“테네브레이 님? 예레미아 님?”
토텐 부인이 쌍둥이 황녀는 목걸이로 구별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목걸이가 피로 물들어 누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배령이 내려진 테네브레이라고 보는 게 맞았으나 아자젤이 예레미아를 찔렀다는 말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었다.
“…난 예레미아…예요.”
그래. 예레미아구나. 테네브레이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왜 예레미아가 다친 건지 우선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꼭 물어보자.
성수가 통하지 않으니 서둘러 의사를 찾아야겠다. 끝내주게 부조리한 세계답게 성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았기에, 만병통치약이 존재하는 것 치고는 의사의 수가 꽤 많았다. 그때 손가락을 부여잡고 돌아온 젤리가 엄살은 끝냈는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은 틀렸어요. 아자젤이 낸 상처라서 낫지도 않을 거고, 성수도 통하지 않는데 의사가 고칠 수 있을 리 없어요. 의사란 것들은 껍데기에 바느질이나 해 대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순전히 의지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에요.”
젤리의 말을 들은 것인지 예레미아가 숨을 헐떡였다.
“난, 나는 죽기 싫어….”
물기를 잔뜩 머금어 축 가라앉은 바람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예레미아는 동아줄을 찾는 듯이 허공에 손을 뻗어 휘저었다가 내 손을 잡았다. 상처가 난 손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손이 유독 뜨거웠다. 꼭…, 꼭 눈앞에 있는 게 소설의 규칙을 벗어나 종이를 찢고 나온 진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신의(神醫)가 되어서 외상을 고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포지션이 성녀도 아니라서 게임처럼 힐을 남발하지도 못했다.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지? 가진 건 돈 뿐인데, 성수를 사도 통하질 않았고 악녀의 명성도 좀 두려움이나 사는 정도였고…. 도움이 안되네. 진짜 빙의할 몸을 잘못 골랐어…. 빙의? 아, 맞아, 난 빙의자였지.
난 빙의자였고, 빙의자는 빙의 전문이다.
비어 있는 몸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몸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 멜렉! 맞아, 멜렉이 있었지!
“우선 자리를 옮겨야겠어요.”
가브리엘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숲은 꽤 넓은 편이었지만 황제가 기사들을 풀어 수색에 전념하니 언제 다시 발각될지 몰랐다.
“젤리, 로한슨 저택으로 가자.”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꾹 참으며 버텼는데 이런 식으로 저택에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가브리엘이 예레미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예레미아는 방금 소원을 비는 걸 끝으로 기력을 다했는지 정신을 잃었다. 작게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걸 보여 줬다. 그럼에도 간절한 마음은 진심이었는지 예레미아의 작은 손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나를 꼭 붙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펴보는데 언제 깨어난 건지 기사 하나가 바닥에 붙어 눈만 껌뻑이며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얼마나 공포에 질린 것인지 기사는 다시 눈을 감아 기절한 척할 생각도 못 했다. 내가 탈옥했다는 걸 이실직고하면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젤리가 기사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기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데이지가 불러일으킨 유행이었다.
“이제 말 못 할 거예요.”
젤리는 뒤통수를 때리며 무슨 마법의 도움을 얻었는지 기사가 입을 다물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젤리가 그렇다면 믿어야지 뭐.
젤리가 손을 튕기자 숲은 내 방이 되었다. 젤리는 곧바로 멜렉을 데리고 오기 위해 사라졌다.
당연히 방이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소파 위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자는 칸나가 보였다. 얘는 편하게 지내라고 백작 부인의 방까지 내어 줬는데 왜 불편하게 소파에서 자는 거래. 칸나가 나를 걱정하여 내 방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뭉클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자세가 불편해서 그리 깊게 잠든건 아닌지 칸나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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