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데리러 오는 건 당연한 거지.”
차라리 젤리가 한 말대로 자기 혼자서 도망칠 수 있을 상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피로 엉망이 되어 축 늘어진 몸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고작이었다. 젤리의 위로 가브리엘이 겹쳐졌다. 둘 다 나와 얽히는 바람에 이렇게 다친 것만 같았다.
어쩐지 울적해져 괜히 젤리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실컷 손길을 누리다가 갑자기 꼬집히니 당황한 듯 젤리가 말을 절었다.
“주…, 주인님? 갑자기 왜…?”
억울하다는 투였다. 왜긴 왜야. 내 눈에서 눈물을 보이게 할 뻔한 죄다. 마차에서 마음을 굳건히 하자고 열심히 스스로를 다잡았는데, 다 소용이 없어질 뻔했잖아.
그래도 다행인 건, 젤리의 상처는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거였다. 헤나가 자신의 팔을 그어 피를 먹이려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젤리를 회복시킨다고 다른 사람을 던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만 고민하니 젤리를 쓰다듬는 내 손이 보였다. 아, 내가 있었네.
헤나의 피가 효능이 있던 건 축복을 흐르는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성수가 통하지 않는 몸이었다.
과연 내 피는 얼마만큼의 효능이 있을까.
축복을 받지 못했으니 효과가 없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바닥의 깨진 병을 들어 살짝 손가락 끝을 찔렀다. 따끔한 고통이 일더니 손끝에 붉은 방울이 매달렸다. 나는 살살 쓰다듬고 있던 손을 턱으로 가져다가 입을 억지로 벌리게 했다.
“입 열어, 젤리.”
“싫…어요…. 먹고 싶지 않아요….”
젤리는 고개를 돌리며 반항했다. 기겁해대는 게 꼭 내 피가 극독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굴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인님을… 먹어요?”
물론 젤리가 거부하는 이유는 푸딩처럼 ‘감히’ 내 피를 마시기가 외람되다는 의미지만. 젤리는 날 여태 먹어왔던 먹이들과 동일시하는 데 거부감을 느낀 것 같았다.
“젤리.”
젤리는 내가 손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이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헤나 쟤가 누굴 보고… 배웠나 했더니….”
인과관계를 따지면 사실 내가 헤나를 보고 배운 거지만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젤리가 흘끔 문 쪽을 바라봤다. 문 너머에 있는 푸딩을 의식한 거겠지.
“이걸 보면 푸…딩이 절 죽이려 들…걸요….”
그럴 리가. 푸딩은 아픈 친구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거다. 응. 아마도….
“쟤가 자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괭이 새끼 눈뜨면 난 진짜 죽었다. 젤리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가만 입을 벌렸다가 와앙하고 내 손끝을 물었다.
처음에는 가만 혀를 대고 있던 젤리가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간을 보듯이 혀를 톡톡대기만 하더니 눈치를 보다가 내 손을 깨물었다. 예고 없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아무래도 내가 찌른 상처가 얕아서 더 큰 상처를 낸 것 같았다.
자기가 물어놓고는, 위로라도 하듯이 까끌까끌한 혀가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을 핥았다. 막대사탕을 간접 체험하는 기분이다. 젤리가 내 손을 뱉지 않고 그대로 문 채로 웅얼거렸다.
“벚꽃 맛이 나네.”
거기다 맛 평가까지. 안 먹겠다고 한 건 어디 사는 누구인지 벌써 집에 돌아갔나 보다.
한쪽 손은 젤리가 마음껏 핥아먹든, 깨물어 먹든 하라고 주고 다른 손으로 털 사이를 헤집으며 상처를 살폈다.
살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능이 좋은 모양이다. 그러니 젤리가 저렇게 내 손을 아이스크림마냥 핥아대고 있지.
젤리의 몸이 어느 정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거의 회복이 되었다 싶을 때 손을 빼냈다. 젤리가 뺏기지 않겠다는 듯 양손으로 붙잡아 저지했다. 손?
언제 사람 모습으로 다시 변한 건지. 상처에만 집중하느라 알아채는 게 늦었다. 사람 모습으로 변하니 외관을 확인하는 게 더욱 수월했다.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려 보았다. 눈도 제대로 있고, 코도 멀쩡하고, 귀도 두 개고…. 목에도 졸린 자국이 없다. 이도 빠진 게 없네.
손가락으로 치아의 개수를 센 후 손을 빼냈다. 피와 체액으로 범벅된 손이 축축했다. 녹고 구멍이 뚫려 벌집 같던 몸도 매끈해졌다. 이만하면 상처가 전부 나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노로 끓어오르던 속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이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정말 젤리가 당장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졌을 텐데, 상처가 나을 수 있으니 이렇게 따지면 젤리가 악마라서 다행인 건가.
그동안 악마가 아닌 웨어울프라면서 온갖 변명을 가져다 대며 현실을 부정하고 행복 회로를 돌렸던 과거가 무색했다. 하지만 젤리를 수인이라 생각했던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꼬리를 흔드는 게 영락없는 개가 아니고 뭐야.
“맛있었어?”
“네? 아니, 네. 아니, 이게 왜 맛있지?”
고장 난 로봇처럼 멍하니 대답하던 젤리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제 몸을 더듬어댔다.
“왜 주인님 피를 먹었는데 내 몸이 나아요? 혹시 저 없는 사이에 태양신 신도로 전향하셨어요?”
“그럴 리가.”
별 헛소리를 다 하는 걸 보면 이제 좀 살만해졌나 보다. 태양신 신도로 전향은 무슨, 오히려 앞으로 끝내주는 신성모독을 할 생각이다.
호들갑을 떠는 젤리를 뒤로하고 성수를 하나 따 손에 묻은 침을 씻어냈다. 젤리에게 피를 먹이느라 만든 상처는 성수에 닿았음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전에 아자젤의 칼을 막았을 때 났던 상처도 낫는데 꽤 오래 걸렸으니, 이 상처 역시 오래 남을 것이다.
젤리는 내가 손을 씻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무척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나한테 성수는 그냥 물이고, 그냥 물로 손 씻은 거니까 상처받을 거 없는데. 손을 젤리 옷에 닦기까지 하면 아주 가출하겠다고 나올 것 같아서 그건 안 하기로 했다.
“헤나.”
“네? 네….”
성수 병 하나를 더 집어 헤나를 불렀다. 헤나가 머뭇대며 다가왔다.
헤나의 옷 소매를 걷어 올려 팔에 천천히 성수를 부었다. 나와 다르게 헤나는 바로 새 살이 차올랐다. 역시, 즉효성 만병통치약.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수에 닿은 헤나의 상처는 곧 깨끗하게 나았으나 나는 헤나의 순을 놓아주지 않았다.
헤나는 몹시 어색하다는 듯이 내게 손목이 잡혀 있었다. 헤나가 고개를 바닥으로 푹 떨궜다.
“헤나, 내게 할 말 없니?”
“…….”
“로한슨 사람들이 많이 다쳤어.”
헤나의 손이 움찔 떨렸다.
“주인님, 걔는 그냥 주교한테 속아서…!”
“쉿.”
젤리가 헤나를 감싸주려 했으나 나의 조용히 하라는 명령에 꼬리를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당연히 마리크 주교한테 속아 넘어간 거지 헤나가 혼자 날 배신했겠어.
거기다 헤나가 젤리에게 피를 먹이려 했던 걸 보면, 헤나 역시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헤나는 내가 자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헤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화재로 죽은 사람은 없지. 젤리가 모두 구해 냈거든.”
미련한 젤리가 다친 몸을 이끌고 사람들을 죄다 불길 속에서 끄집어냈다. 메리가 젤리의 활약상을 얼마나 생생히 전달했는지 모른다.
비록 그 이후에 비록 성기사들의 눈멀 칼에 죽은 사람이 있었으나 그건 마리크 주교의 죄였지 헤나의 잘못이 아니다.
죽은 자들의 시신은 로한슨 사람들이 대피하기 전 묻어줬다고 들었다. 나조차도 죽은 후에 외운 이름이었다. 그전에는 나를 제외한 이 세계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그저 엑스트라처럼 보았으니 사실 나도 헤나를 나무랄 자격은 없었다.
헤나에게 직접 피해를 입은 젤리는 저렇게 헤나를 옹호하고 있으니 헤나를 원망할 건더기가 있는 건 로한슨 사람들뿐이겠지.
데이지조차 날 가까이서 모셨던 하녀라며 원망했는데, 직접 방화를 저지른 게 아니더라도 저택을 불태우는데 일조한 헤나에게는 더욱 날을 세우며 경계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원한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로한슨 백작가 사람들에게 죗값은 치러야 할 거야.”
“…네.”
헤나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원망을 들으러 돌아갈까?”
헤나는 내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줄곧 소리 없이 울고 있었는지 눈가가 짓물러 있었다. 나는 헤나의 눈을 엄지로 쓸었다.
“칸나가 기다리고 있어.”
헤나에게 따끔한 말을 해 주기엔 칸나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칸나라는 말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 헤나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 영애님…. 미안해 칸나….”
헤나는 숨을 헐떡이며 계속해서 몇 번이고 미안하단 말을 거듭 반복했다. 숨넘어갈라. 헤나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여줬다.
젤리는 내가 헤나를 호되게 질책할 거라 생각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울면서 사과를 하는 헤나에게 운을 띄웠다.
“젤리한테는?”
“됐어요. 이미 사과받았거든요.”
젤리는 엎드려 절받기 싫나 보다.
“뭐, 쟤 덕분에 어찌어찌 살아 있기도 하고.”
젤리가 작게 툴툴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죽지 않는 게 기적일 정도로 다쳐놓고 아파했으면서 흔쾌히 헤나를 용서해 주는 게 꼭 저 자신을 홀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젤리. 네가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네 몸을 너무 홀대하진 마.”
한때 젤리의 입에 성수를 부어 넣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때는 젤리가 악마라는 짐작조차 못 했으니 어쩔 수 있나. 내 딴에는 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 선한 의도로 그랬던 거라며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다.
젤리는 자신이 혼나는 이유를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대며 억울해했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 젤리한테 자아 존중감을 향상시키는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다.
헤나가 어느 정도 진정한듯해 문을 열었다.
“하루트 사제님.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하루트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젤리를 살피고는 이전처럼 처참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에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하루트에게서 푸딩을 건네받았다.
둥글게 몸을 만 푸딩의 위에 올라타서 미어캣처럼 바짝 서 있던 리코가 자신이 푸딩을 잘 지키고 있었다며 가슴을 쭉 펴고 이야기했다. 쥐의 모습을 한 리코는 어쩐지 마브카랑 더 비슷해 보였다. 아니, 마브카가 리코를 닮은 거겠지.
어쩌면 몸이 갈라져 사고가 분할된 탓에 정신연령도 어려진 걸지도 모른다. 리코를 보던 젤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꼬질꼬질한 쥐는 뭔가요?”
아. 그러고 보니 젤리는 리코를 모르는구나?
“이쪽은 로한슨 저택에 불을 질렀던….”
“뭐! 이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게!”
“…악마한테 몸을 뺏겼다가 역으로 악마를 억눌러 널 구하러 오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이야.”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쥐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쥐잖아.
“네?”
쥐를 터트릴 것처럼 꽉 움켜쥐었던 젤리가 머쓱하니 리코를 다시 내려주었다.
“이거 은인을 몰라봤네. 하하,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젤리는 휘파람을 불며 리코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리코가 짜부라져 젤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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