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아는 합리화를 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머랭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예레미아는 상대적으로 타르트가 괜찮은 별명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사실 에반젤린은 예레미아에게 타르트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으므로 어디까지나 푸딩과 젤리가 아자젤의 낯짝을 한 예레미아를 놀리는 것에 불과했다.
[pensamento]하지만 내용물이 저래서야 놀리는 재미가 없네.[/pensamento]
젤리는 예레미아의 순진한 면모를 보며 이래서 쌍둥이에게 뒤통수를 맞았구나 하고 실감했다.
“재미없으니까 그냥 아자젤이라 부를게.”
“그 이름은 싫어요!”
아자젤이 볼을 부풀리고 발을 굴리는 걸 보고 푸딩은 다시 한번 질색하며 외면했다. 에반젤린이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예레미아에게 절대 아자젤에게 쌓인 원한을 분풀이하지 말라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래, 예레미아.”
젤리가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해 주었다.
예레미아는 이름을 빼앗긴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만족하며 누그러들었다. 황녀의 신분이던 예레미아는 젤리가 자신에게 하대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아자젤의 몸으로 황녀 취급받을 생각도 없었다. 사실 그것보다 새로운 몸을 입으면서 인간과는 다른 감각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젤리와 푸딩에게도 고개가 숙어지는데 에반젤린 로한슨은 상상 이상이었다.
차라리 에반젤린을 악마라고 여기던 시절이 더 낫지, 아자젤의 몸에 들어와서 본 에반젤린은 기이하게 짝이 없었다.
“있죠…. 로한슨 영애는 사람이 맞아요?”
예레미아의 질문에 답이 갈라졌다. 젤리는 자신도 짐작이 가질 않는다며 어깨를 으쓱였으나 푸딩은 단호하게 답하였다.
“에반젤린 님은 신앙이지.”
신앙이면 사람을 넘어서 관념적인 무언가였다. 푸딩은 그래서 에반젤린에게 한없이 굴복하며 순종하고 싶다고 하였다. 젤리는 자기는 거기까지는 아니라며 푸딩과 선을 그었으나 배를 뒤집어 까는 건 같았으니 사실 예레미아 눈에는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예레미아는 핏자국을 닦으며 방 안에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흔적을 지우고 있던 하녀에게도 물었다. 에반젤린이 눈앞의 하녀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뭘 알지 않을까 싶었다.
“아가씨요? 알테미시아 님이 들으시면 좋아할 만한 주제네요.”
에반젤린이 잡혀들어간 이후 로한슨 백작이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인을 내쫓았기 때문에 에반젤린의 드레스를 만들던 알테미시아 역시 돌아간 이후였다. 에반젤린을 못 보고 간다며 얼마나 서운해하던지….
칸나는 악마의 껍데기를 쓴 소녀의 질문에 볼을 붉히며 답했다.
“아가씨는… 사랑하는 구원자세요.”
그리고 칸나는 예레미아에게 되물었다.
“황녀님은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상치 못한 반격에 예레미아는 잠시 당황했다가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숲에서 눈을 감던 순간 은하수를 봤을 때부터 감상은 같았다.
“별…, 별이요.”
결국, 예레미아 자신조차 에반젤린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예레미아는 이들이 에반젤린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순종하고 있는지를 느끼며 마지막으로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대답은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저는….”
“해가 떠오르네.”
가브리엘이 고민하는 사이 젤리가 창틀을 넘어오기 시작한 햇빛을 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젤리 씨. 밝아지기 전에 출발하는 게 좋겠군요.”
가브리엘은 젤리가 화제를 전환해 준 것에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예레미아의 몸을 들어 올렸다. 예레미아의 몸은 가벼운 축이었기에 축 늘어져 있다 해도 가브리엘이 들기에 큰 무리가 가지 않았다.
“얘 데려다주고 올게.”
젤리가 손을 흔들며 가브리엘을 데리고 사라졌다.
공개적으로 답하는 것을 피했을 뿐 가브리엘은 분명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예레미아는 듣지 못한 가브리엘의 답이 궁금했다.
젤리는 예레미아가 쓰러졌던 숲으로 이동했다. 바닥에는 기사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는데 그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젤리가 근처로 오지 못하도록 인식 저하 주술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얜가?”
하나씩 뒤통수를 치던 젤리가 익숙한 촉감을 발견했다. 젤리가 뒤통수를 내려쳐 도로 기절시킨 사람이었다.
“얠 죽이는 걸 깜빡했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가브리엘이 공격했다.’ 정도로만 알고 있으니 그냥 두어도 괜찮았으나 도중에 깨어나 에반젤린을 목격한 사람은 그냥 둘 수 없었다. 젤리는 발로 목을 밟아 목뼈를 부러트렸다. 우득, 조용한 숲속 탓인지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젤리 씨.”
“왜? 얘가 주인님을 봤으니 일러바칠 거 아니야.”
증인을 인멸한 젤리는 되려 가브리엘에게 뒤처리가 미숙하다며 핀잔을 주었다.
“마냥 그렇게 착하게 살지는 마. 네게 무엇이 최우선인지 결정했다면 그걸 따라야지.”
가브리엘을 보는 눈이 둥글게 휘었다. 가브리엘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젤리는 모습을 감추었다. 로한슨 저택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쓰러진 기사들과 사체를 보던 가브리엘은 젤리가 한 말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자칫 잘못했다면 에반젤린의 이야기가 마리크 주교에게 흘러 들어가 후환을 만들었을 것이다.
태양신의 볕을 피하기로 선택한 이상, 그림자로 숨어드는 것에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되었다.
젤리가 불어넣은 경고를 새긴 채 가브리엘은 숲을 벗어나 황궁으로 향했다.
***
“테네브레이가 맞군.”
황제는 예레미아의 시체를 확인하였다.
황제는 그리 유심히 살펴보지도 않고 목걸이의 색을 확인한 후 잠깐 배를 살펴보고 바로 판단을 내렸다.
생김새와 흑색의 목걸이. 누가 보더라도 테네브레이라고 판단을 내릴 것이다. 황제는 붉게 물든 배의 옷감을 보았다.
예레미아의 배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황제는 예레미아의 문양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이상함을 느낄 것이라 여겼으나 추궁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경이 찌른 건가?”
“아닙니다.”
황제는 그 대답을 듣고 한 시름 놓았다.
마리크 주교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하필 손녀의 시신을 가져온 게 가브리엘이었다. 꼬리를 먹는 용의 자식들이란 항상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며 착잡해서 하기도 했다. 아들을 죽인 손녀를 자신이 버린 아들이 다시 죽이다니 그런 우스운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테네브레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해 보아라.”
가브리엘은 상황을 약간 바꾸어 전달하였다. ‘테네브레이’는 기사들에게 습격당하여 죽어가고 있었고, 가브리엘은 생포하여 올 생각이었으나 이미 흘린 피가 너무 많아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테네브레이가 남긴 말이 있느냐? 비록 아비를 죽인 죄인이나 죽기 전에 무어라 했는지 듣고 싶구나.”
황제는 죽은 손녀의 유언이라도 들어줄까 싶어 물었다. 가브리엘은 황제의 저의를 알면서도 부러 그녀가 듣기 싫어할 말을 골라 답했다.
“죽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황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건 이미 들어줄 수 없는 유언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은?”
“자신이 테네브레이가 아니라 예레미아라고 하셨습니다.”
“뭐?”
가브리엘은 황당해하는 황제를 응시하며 조금 전 예레미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조모님은 절 구분하실 수 있을까요?”
예레미아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답하지 못하였으나 애초에 답변을 듣고자 한 질문이 아니었다. 황제는 예레미아와 테네브레이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가브리엘 경. 왜 아자젤이 내 배를 찔렀는지 아시나요?”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자젤은 제 배에 있는 문양을 없애려고 했던 거에요.”
“문양이요?”
“황족들에게는 문양이 남아 있어요. 용이 둥글게 몸을 감은 모양인데, ‘꼬리를 삼키는 자’라고 해서 우로보로스라고 불러요.”
예레미아의 설명을 들으며 가브리엘은 자신의 심장 위에 새겨진 흉터를 떠올렸다. 가브리엘의 흉터 역시 설명과 같았다. 다만 자신의 것은 문양이 아닌 흉터라는 점에서 달랐을 뿐이다. 추측이 실체를 가지고 성큼 다가왔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예레미아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 양 깔깔 웃었다. 두 사람을 황궁으로 옮겨주라는 에반젤린의 명령을 듣고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젤리가 아자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예레미아가 웃는 모습을 보며 질색을 해댔다.
예레미아는 젤리가 질겁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아자젤’이라는 걸 잘 알아 혐오스러워하는 눈초리를 받고서도 상처받지 않았다.
“황족들을 태어난 후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사제로부터 공증을 받아요.”
달군 쇠로 갓난아이의 몸에 낙인을 찍고 성수를 부어 치료하니 우로보로스의 문양은 혈통서나 마찬가지였다. 건국 초기에 사생아와 정통성 있는 후계를 구분 짓기 위해 낙인을 찍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한다.
마치 신전에서 열리는 세례식과 비슷했다. 가브리엘은 성수가 통하지 않는 몸이었다. 가브리엘이 지금 기사 단장의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라파엘라 덕분이었다. 당시 라파엘라가 가브리엘에게 세례식을 통과하는 수작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에겐 그런 일이 불가능하겠지. 그래서 낙인을 찍은 후,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성수가 통하지 않으니 문양 대신 가브리엘처럼 흉터가 남게 되는 게 아닐까?
가브리엘은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어지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가브리엘은 불길하게 뛰어대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에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가브리엘이 자신의 출생에 미심쩍은 추측과 본능적인 확신을 갖게 된 것을 모르고 예레미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와 테네브레이는 쌍둥이지만 다른 점이 있어요.”
세간에는 둘을 구분하는 것이 목걸이뿐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황족들만 아는 구별법이 하나 더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저를 먼저 낳으셨어요. 제 배에 낙인을 새기고 난 후에야 다시 진통이 시작됐죠.”
예레미아가 태어난 순간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쌍생이 태어날 것이라는 걸 몰랐다. 예레미아는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 무사히 몸에 낙인을 남겼다.
그러나 예레미아가 태어난 지 몇십 분 뒤 황태자비는 다시금 산통을 겪었다. 머지않아 둘째인 테네브레이가 태어났다. 일반 가정집에서 태어나도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바로 쌍둥이다. 그런데 심지어 황실에서 쌍생이라니 그 파장이 얼마나 컸을까.
“폐하께서는 뒤늦게 태어난 동생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낙인은 찍지 않은 거로군요.”
“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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