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해? 딱 봐도 껄렁껄렁한 게 양아치처럼 보이는데 어딜 봐서 진중하다는 거야? 젤리는 건들건들 걸어와 에반젤린의 뒤편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에반젤린과 대화하고 있던 데이지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너는?”
마찬가지로 젤리를 알아봤는지 데이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저, 저는 그만 가 볼게요.”
데이지는 불안해하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달아나기 시작했다. 라파엘라는 갑자기 도망가는 모습에 당혹해하며 데이지를 불렀다.
“수녀님! 같이 가셔야죠!”
“괜찮아요! 마차를 타는 곳이 바로 앞이잖아요!”
마차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코앞이었다. 이 거리를 함께 간다고 해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것 같지도 않아 라파엘라는 데이지를 잡지 않았다.
“가셨네요.”
그리고 에반젤린 로한슨에게 길 안내를 한다며 둘이 대화를 하기 편하게 거리를 벌렸다. 온 신경은 뒤로 향해 있었다.
“누구요? 아. 아까 걔? 음… 약간의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
“아니에요. 오히려 도와줬다니까요. 쟤를 밖으로 빼내서 같이 도망쳤다고요.”
“뒤처리도 깔끔하게 했어요.”
이번에도 에반젤린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반 토막 난 대화였으나 라파엘라는 저 대화를 들은 덕분에 실마리를 풀었다.
방금 유리엘에게 물었던 답이 남자에게서 돌아온 것이다.
데이지가 수도원에서 도망치는 걸 저 남자가 일조했다. 그리고 남자는 에반젤린의 호위로 가장하고 있었고.
에반젤린은 데이지의 존재를 몰랐다. 반면에 데이지는 에반젤린은 물론이고 [glossario termo=”Círculo de Conjuração”]주술 진[/glossario]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르가 [glossario termo=”Padre”]사제[/glossario]가 주술을 부리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데이지의 도주를 도운 건 데이지를 몰랐던 에반젤린 로한슨의 호위라고 하는 자였다.
도운 건 저자의 일방적인 호의인가?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수도원에 있었지? 하필 그때? 외부인이 어떻게?
라파엘라의 머릿속은 생각하고 추론하여 가장 이상적인 답안을 도출해 내기 위해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파엘라의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질 무렵 뒤에서 큰 소란이 들렸다. 에반젤린의 대화에 집중하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라파엘라가 웅성거림을 가장 먼저 눈치챘다.
“불이! 불이 났어요!”
“기사님! 누가 여기 좀 와 봐요!”
“안 돼!”
잔잔하고 성스러운 대신전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들이다. 유리엘이 망설이지 않고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라파엘라도 그 뒤를 따르려다 에반젤린과 젤리를 보며 멈춰 섰다. 이 둘을 어떻게 해야 하지? 두고 갈 수는 없는데.
“어서 가 보죠.”
라파엘라의 고민을 눈치챈 듯 에반젤린이 말했다. 라파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둘을 지나쳐 뛰었다. 불? 불이라고?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라파엘라는 소리를 따라서 정신없이 달렸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몹시 익숙한 곳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칼에 베인 것처럼 날이 선 비명들이 시시때때로 터져 나왔다. 절규하는 자들은 오로지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라파엘라 역시 그들의 시선에 합류했다.
화마였다. 불타고 있는 건 도나우 블루가 그려진 짐 노페디의 역작이다. 불이 소진되고 난 뒤의 정경을 담고 있는 그림에 다시 불이 재점화했다.
다친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림에 동화되어 절규하는 사람들이 소름이 끼치게 다가왔다. 그건 먼저 달려간 유리엘 역시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유리엘은 허망한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뒤얽혀 고통스러워하던 자들이 라파엘라를 발견했다. 그들은 무릎으로 기어서, 바닥을 걸어서, 휘청거리는 두 발로 다가왔다.
“기사님 불을 꺼 주세요.”
“기사님, 그림에 불이, 불이.”
각자 저마다의 기원을 내뱉었으나 라파엘라는 모든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림의 불을 꺼 달라. 그들이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굳이?’
불을 굳이 꺼야 할까? 그림이 전부 타 사라지면 저 사람들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 아닐까?
그런 가설이 라파엘라를 붙잡았다. 유리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둘이 망설이는 사이에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에반젤린 로한슨이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라파엘라의 시야에 긴 금발이 가득 찼다.
“미쉘?”
“미친, 쟤가 왜 여기 있어? 방에 가둬 놨는데!”
당황하여 미쉘을 붙잡으려 했으나 제발 불을 꺼달라며 발을 잡고 있고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라파엘라를 방해했다.
그들은 미쉘이 입고 있는 기사단의 정복을 보며 똑같이 부탁했다.
“기사님, 그림을 구해 주세요!”
라파엘라는 미쉘이 그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미쉘은 불타는 그림을 맨손으로 뗐다. 활활 타는 불길을 손으로 점화하려 들었으나 불이 꺼지기는커녕 손을 지지는 꼴이었다. 미친놈, 뜨겁지도 않나?
라파엘라는 자신에게 매달린 사람들을 걷어 냈다. 팔을 뿌리치고 발로 걷어찼다.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았으나 미쉘이 미친 짓거리를 하는 걸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미쉘! 정신 좀 차려! 그거 놓으라고!”
그림은 멈추지 않고 타들어 갔다. 이제 반절도 남지 않았다. 미쉘의 피부가 붉게 그을렸고 옷에 불씨가 옮겨붙었다. 이대로라면 미쉘이 함께 타 죽을 것 같았다. 라파엘라는 매달린 사람들을 그대로 대동한 채 발을 끌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리고 뒤에서 유난히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체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열기가 가시고 오한이 들었다. 등 뒤에서 아주 거대한 것이 라파엘라를 지긋이 응시하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여유롭게 지옥도를 가로질렀다. 라파엘라에게 매달리던 사람들은 넋을 놓고 에반젤린 로한슨을 바라봤다. 그들이 앓던 소리도, 고통에 찬 비명도 모두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고 마치 온 영혼을 사로잡힌 것처럼 에반젤린만 바라보고 있으니, 에반젤린 로한슨은 미쉘의 코앞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도달할 수 있었다.
미쉘은 그림을 끌어안은 채 에반젤린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라파엘라는 또 하나의 광신자가 탄생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새하얀 사람, 존재하는 색채라고는 그림에 붙은 불과 같이 타오르는 붉은 눈뿐이다. 에반젤린과 눈이 맞은 순간, 미쉘은 그 눈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열망, 경악, 경외, 감격 온갖 형용사를 들어도 미쉘의 감정을 일축하지 못할 거다.
에반젤린은 손가락을 까딱였고, 그 의사를 정확히 읽어 낸 젤리가 [glossario termo=”Água Benta”]성수[/glossario]를 대령했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성수 병의 마개를 열어 미쉘에게 물을 부었다.
한 병, 두 병, 불길이 멎을 때까지 계속.
미쉘을 집어삼킬 것 같던 불길은 그렇게 쉽게 멎었다. 침묵 속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오롯이 존재했다. 미쉘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축 처진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맺혀 땅으로 추락했다.
성수에 흠뻑 젖어 눈만 깜빡이던 미쉘은 곧 기력을 다하고 쓰러졌다.
“미쉘 경!”
유리엘이 서둘러 달려가 쓰러진 미쉘을 받아 들었다. 기절한 사람 주제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평온해 보였다.
에반젤린은 미쉘이 그때까지 꼭 쥐고 있던 그림의 조각을 뺏어 들었다. 거의 다 타들어 가 남은 거라곤 그 주술 진뿐이었다.
에반젤린 로한슨이 눅눅하게 젖은 종잇조각을 젤리에게 던졌다.
“으차.”
그리고 옆에서 그걸 능숙하게 받아 내는 꼴을 보고 있으니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멍해 있었다. 저들이 조금 전처럼 울든 화를 내든 차라리 무슨 반응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비현실적이진 않았을 거다.
“성수를 부었으니 따로 치료할 필요는 없겠네요.”
홀로 의연하게 서 있는 에반젤린이 여상스럽게 말했다.
***
와… 로판 민족들 도덕·윤리 실화냐? 힘들어서 온몸의 진이 다 빠질 것 같다.
갑자기 유리엘이 뛰쳐나가고 라파엘라가 유리엘을 따라가고 싶다는 눈빛을 열렬히 보내기에 가 보자고 했더니 전속력으로 달려가더라.
유리엘이랑 라파엘라가 얼마나 빨리 달려가던지 쫓아가지도 못해서 젤리가 가르쳐 준 방향대로 걸어갔다. 역시 웨어울프도 갯과라서 그런지 냄새를 참 잘 맡는단 말이야.
없는 체력으로 열심히 걸어갔더니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불타는 사람을 두고 다들 무슨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왜 다들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 무슨 일 벌어졌을 때 신고 대신 SNS에 올리기 위해 휴대 전화기로 촬영부터 하는 구경꾼들을 보는 줄 알았다. 아니 너희는 휴대 전화기도 없으면서!
전에 도나우 집이 불탈 때도 다들 모여서 불구경하고 있더니 사람이 불타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어? 윤리의식도 없는 놈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진심, 무슨 상황이래? 이게 무슨 경우야 진짜! 불났잖아! 게다가 그게 사람한테 옮겨붙기까지! 큰일났다. 소화기 어디 있어! 아, 여기에는 소화기 없으려나?
그러면 물, 물은 어디 있는데? 신전 바깥 정원에 분수대가 있던 기억만 난다. 물 어디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물병을 들고 있는 젤리를 발견했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다.
서둘러 손짓해서 젤리한테 성수 병을 뺏었다. 마개를 따고 물을 부었다. 좀 콸콸 쏟아지면 좋겠는데 입구가 좁아서 그런지 좔좔 흘렀다. 무슨 시냇물이냐고! 짜증이 나서 손짓을 하자 젤리가 눈치 좋게 뚜껑을 딴 성수 병을 쥐여 줬다.
성수를 한 여섯 병 정도 부으니 불길이 멎었다. 다행히 얘가 보통 물이 아니라서 점화 효과도 뛰어나나 보다.
와… 죽다 살았네. 긴장이 쫙 풀렸다. 방금까지 불길에 휩싸여 있던 사람이 촉촉하게 젖어 나를 바라봤다. 아니… 이건 축축한 건가? 완전 물에 빠진 생쥐 꼴이네. 물에 젖어서 그런가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미… 미안! 하지만 불에 타 죽는 것보단 물 맞는 게 낫지 않나?
“미쉘 경!”
아닌가 보다. 기절해서 쓰러지는 걸 유리엘이 겨우 잡았다. 라파엘라가 무슨 무뢰한을 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 아니, 내가 불도 껐는데 왜 이렇게 노려보는데! 심지어 젤리마저 상처받은 것처럼 나를 보길래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진짜 억울해. 잘못한 게 없는데 죄인 취급을 받으니 억울해서라도 더 뻔뻔하게 생색을 내기로 했다. 내가 그냥 물을 부은 줄 알아? 이거 성수야!
“성수를 부었으니 따로 치료할 필요는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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