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가 젤리의 손에 발길질하더니 토라져 획하고 고개를 돌리고 푸딩의 위로 다시 올라탔다. 보통은 쥐가 개와 한편을 먹고 고양이한테 대적하지 않나? 그런데 젤리는 왜….
추리에 실패한 젤리는 머쓱하니 시선을 돌리며 이제 하루트에게 관심을 두었다. 하루트가 사제라서 그런지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에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저 사제는요?”
“하루트 사제님이셔.”
하루트가 얼떨결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소개를 끝낸 다음, 젤리와 헤나에게 계획을 전했다.
“젤리, 너는 헤나랑 같이 신전을 빠져나가. 하루트 사제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네? 저요? 지금 저도 같이 도망치라고요?”
젤리가 잘못들었다는 양 다시 되물어왔어도 내가 들려줄 답은 똑같았다. 젤리는 차라리 호사퀸 공작저로 돌아가야 더욱 안전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젤리의 안전이 확보되어 더 안심할 수 있을 거고.
“전 그냥 주인님 곁에 남아있을래요.”
그러나 젤리는 자신을 배려하는 줄도 모르고 이제 몸도 전부 나았는데 왜 자신이 돌아가야 하냐며 반항했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환자였다는 기억은 지워 버린 건가?
“저… 그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셨으니 무리하시는 건….”
헤나가 조심스럽게 젤리의 말을 반박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젤리의 상처를 직접 보았던 나나 헤나뿐만이 아니라, 잠깐 스쳐보았었던 하루트나 리코까지 젤리가 남아있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토라져있던 리코마저도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젤리는 이제는 나한테 매달려서 도움이 될 테니 보내지 말라며 떼를 쓰고 있었다.
“저도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도움 말고, 자길 걱정한다는 생각은 없는 건가? 왜 자꾸 자신의 가치를 폄훼하려 드는 건지. 이것도 내 잘못이다. 역시, 돌아가서 자아 존중감 향상 프로젝트를 실시해야겠다. 가브리엘이랑 젤리를 모아놓고 같이 수업하는 거야.
물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을 젤리를 설득해낼 방법부터 생각해 내야겠다. 곰곰이 고민하다가 젤리의 천적인 푸딩을 들먹이기로 했다.
“젤리. 이제 푸딩을 깨울 생각이야.”
“윽…”
푸딩의 이름만 나오기만 했는데도 젤리가 질색해댔다.
“내 생각에 푸딩은 네가 어떻게 멀쩡해졌는지 이유를 듣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네…? 이유요?”
“그래, 예를 들어 내 피를 먹어 치워서 몸이 나았다던가? 무슨 맛이랬지, 그래…. 벚꽃맛이라고 했었나?”
젤리의 몸이 바짝 굳었다. 내게 유별난 구석이 있는 푸딩이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되레 젤리의 피를 전부 뽑아내 버리겠다며 날뛸 게 분명했다. 나는 웃으며 재차 물었다.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전 ‘기다려’가 주특기인 개새끼거든요.”
젤리는 냉큼 꼬리를 말았다. 역시 젤리의 카운터는 푸딩이다. 어서 서둘러 가자며 재촉하는 젤리의 머리를 토닥여줬다.
***
헤나와 젤리는 신전을 벗어나 우선 호사퀸 공작가로 향하기로 했다. 헤나는 사실, 아직도 자신이 칸나에게 돌아가는 이 상황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나도 함께 가는구나….’
무심코 로한슨 영애님이 헤나를 남겨둔 채, 젤리만을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야 당연했다. 헤나는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영애님께 큰 죄를 저질렀으니까.
헤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에반젤린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유리 조각에 그인 상처는 성수로 씻긴 듯이 나았다. 상처는 사라졌고, 젤리도 회복했다. 가만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의 일이 전부 일어나지 않았던 환상처럼 느껴졌다.
이렇듯 헤나가 저지른 일들 역시 모두 한낱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헤나는 시선을 들어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다. 에반젤린을 숭배하는 자들이 많은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나타나 기적을 선물해 주는 존재를 어찌 숭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마치 이적을 베풀기 위해 나타난 존재인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헤나는 칸나처럼 에반젤린을 맹목적으로 숭배할 수 없었다. 헤나는 에반젤린 로한슨이 구원자가 아니며, 모든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신은 더더욱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은 악마도 얼마든지 행해 낼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여전히 영애님과 삿된 악마를 겹쳐 보는 걸 멈추지 못하다니, 어쩌면 마리크 주교가 불어넣은 불온한 생각이 아직 잔존해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나는 어째서 칸나가 에반젤린을 그토록 따르는지. 애타게 매달리는지 조금은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아주 약간.
헤나는 에반젤린이 쥐었던 손목을 덧그리듯 붙잡았다. 시린 감촉이 아직 남아있어 현실을 자각시켰다. 마치 얼음 조각 같은 손이었다. 비록 헤나는 우습게도 서늘한 손에서 온기를 찾았지만.
에반젤린은 원망할 대상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로 헤나 역시 함께 데려가고자 했다. 그중 가장 헤나를 원망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칸나….’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 로한슨의 사람들과 다르게, 칸나는 홀로 호사퀸 공작저에 남아있기를 택했다고 한다. 헤나가 호사퀸 공작저로 향하면 칸나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겠지.
헤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마 칸나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동생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괴물 취급한 데다 결국 저 버리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어림짐작하기도 두려웠다.
머뭇거리는 헤나를 젤리가 재촉했다.
“어서 가자. 저 못돼먹은 고양이가 깨기 전에 어서 튀어야지.”
“저도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종을 울리기 위해 사제들이 올 시간이라서요. 마주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하루트가 동조하며 서두를 것을 권했다.
“뭘 곤란해. 마주치면 탑 밖으로 떨어트리면 되는걸.”
목격자가 없으니 완벽한 증거 인멸이라며 젤리가 험궂은 농담을 해댔다. 하루트가 무뢰한을 보듯 젤리를 흘겨보았다.
마주친 사제들의 처우는 뒤로하고, 하루트의 말대로 시간이 지체돼선 좋아질 게 없기에 헤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종탑을 내려가는 길은 무척 아찔했다. 벽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헤나가 순간 발을 헛디뎠다. 헤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순간 젤리가 헤나를 잡아챘다.
“조심 좀 해.”
헤나를 바로 세워주며 젤리가 타박했다.
“성수를 그렇게 먹어놓고는 말라빠진 사제보다 허약하면 어떻게 하냐?”
“그 말라빠진 사제라는 게 저는 아니겠죠?”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하루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뾰족하게 물었다.
“아, 미안해라. 작게 말한 건데 들렸어?”
그에 질세라 젤리가 비아냥거렸다. 사과를 하긴 했으나 목소리나 행동을 비롯한 태도는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젤리와 하루트는 비슷한 식으로 입씨름을 했다. 조금 전 젤리가 사제들을 떨어트린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게 아무래도 밉보였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젤리가 악마라는 사실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서로 헐뜯는 것 말고는 더 나눌 말이 없는지 둘 다 곧 입을 다물었다. 헤나는 사제가 어쩌다 로한슨 영애님을 돕게 되었는지 의아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헤나의 생각은 창고에 남아 있는 에반젤린과 푸딩에게로 우회했다.
“정말 저희만 돌아가도 될까요…?”
하루트는 헤나와 젤리에게 신전을 벗어나는 안전한 길을 알려 주기 위해, 리코는 성문으로 가야 했기에 젤리에게 꼬리를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들려 함께 내려가고 있었다. 로한슨 영애님은 무엇을 하기에 우릴 먼저 보내고 창고에 남아 있는 걸까.
에반젤린을 부여잡고 남아있겠다며 떼를 쓰던 젤리는 푸딩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미련을 버렸다.
헤나는 의아해졌다. 성수에 살갗이 문드러지고 고문을 당해도 영애님을 향한 마음이 꺾지 않던 젤리는 정말 단순히 푸딩이 무서워서 고집을 꺾은 걸까?
헤나의 물음에 젤리가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난 지금 방해되잖아.”
“네?”
예상했던 답변과 달라 헤나는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지금은 몸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거든. 내가 있어봤자 짐밖에 더 되겠어. 나보다 차라리 플라우로스 녀석이 더 주인님께 도움이 되겠지.”
자조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답지 않게 진지했다. 곤죽이 되어있을 때도 입은 독하게 살아 있던 것과 대비되는 태도였다. 젤리의 우선순위가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는지 알 수 있는 면모였다.
헤나는 젤리의 심정이 어렴풋이 짐작 갔다. 헤나 역시 칸나에게 자신이 불필요하다는 걸 깨달아 이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헤나는 모른 척 말을 돌렸다.
“플라우로스는 누군가요?”
“아, 푸딩 말이야. 푸딩.”
떠드는 사이 어느덧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다. 선두에 서 있던 하루트가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나가기 전에 두 분께서 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저희가요?”
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하루트에 이야기를 들은 후 헤나는 몹시 당황했다.
“해 주어야 할 거라는 게 이런….”
손에 쥐어진 베일을 보는 눈이 마구 떨렸다. 마리크 주교님인 척 연기를 하라니…. 헤나가 망설이자 하루트가 설득에 나섰다. 하루트는 에반젤린도 설득해 냈으니 이제 무서울 게 없는 듯했다.
“흠흠. 이 방법으로 말하자면, 로한슨 영애님도 채택하신 이미 유용성이 증명된 방법입니다.”
하루트가 목을 풀고는 외판원처럼 판촉 문구를 늘어놓았다.
젤리는 더러운 것을 만지듯 최소한의 부위만 써서 베일을 들어 올렸다.
“이게 먹혔다고?”
“그럼요! 로한슨 영애님께서 얼마나 연기를 잘하셨는지, 마리크 주교님인 줄 알았다니까요? 물론 위기가 있긴 했죠. 나키르 경이 베일을 들쳤을 때는 정체가 들키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나키르? 아하. 그놈이지? 날 밟으면서 낄낄거리던 변태 녀석.”
안 좋은 기억을 상기시켰는지 젤리가 잔뜩 미간을 구겼다.
“그나저나 주인님한테 그 미친 여자의 행세를 하게 했다고?”
젤리가 당장이라도 하루트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아 헤나가 베일을 쓰겠다고 말하며 둘을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젤리 역시 가만히 나갈 수는 없었다. 마침 들어올 때 에반젤린이 푸딩을 안고 있었으니, 그림을 맞춰야만 했다. 하루트는 젤리에게 푸딩처럼 변할 것을 부탁했다. 늑대 모습으로 변한 젤리를 보며 하루트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더 작은 거로는 안 되나요? 예를 들어 로한슨 영애님이 안고 계시던 귀여운 고양이처럼 작은….”
“왜 아주 내 팔다리를 자르고 몸만 데려가지 그러냐?”
“그런 험한 소리는 좀 자제하시는 게 어떤가요?”
그러나 결국 소란을 일으켰다간 에반젤린에게 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하루트의 의견에 젤리가 접어주었다. 크기가 작아지니 꼭 늑대보다 개처럼 보였다. 헤나는 가만 자신의 행색을 떠올리고 젤리를 본 후, 들키는 건 확실하겠거니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베일을 쓴 헤나를 보며 하루트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옷이 달라지긴 했지만… 괜찮아요. 다들 깜빡 속을 거예요.”
대체 어딜 봐서? 헤나는 하루트가 더는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루트를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뒤를 따라 종탑을 빠져나왔다.
며칠 만에 나오는 바깥인지. 한동안 정신이 멍해 있었기에 정확한 날짜는 짐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쏟아지는 햇빛이 베일에 가려 부서졌다.
“주교님, 나오셨습니까.”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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