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나는 조금 놀란 채 숨을 삼켰다. 종탑을 지키는 인원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많은 기사들의 앞에서 의연하게 마리크 주교님인 척 연기할 수 있을까?
거기다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기까지 하니 왠지 모르게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헤나가 마주한 것은 젤리를 고문하던 기사였다.
나키르는 잔뜩 긴장한 채로 헤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크 주교님의 앞에서는 두렵던 기사도 한낱 겁쟁이가 되어버리는구나. 그러나 나키르가 지레 겁을 먹고 있음에도 헤나는 그가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헤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혀를 꽉 깨물어야만 했다.
나키르의 목에 죽 금이 생기더니 이내 뚝 하고 잘려,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조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순간 환상을 본 건가 싶었다.
머리가 날아갔는데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깔끔하고 정갈한 장면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사람이 죽는 광경이라기 보단 잘 도축된 고기를 잘라낸 것 같다는 감상이 들 정도였다.
헤나는 기겁하고 주위의 눈치를 살폈으나 이상하게도 목 없이 서 있는 기사를 두고 아무도 동요하는 사람이 없었다. 헤나는 그 원인일 게 분명한 젤리에게로 눈을 돌렸다.
늑대는 털이 복슬복슬한 앞발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쿡쿡대며 웃는 건가 했더니 그저 입을 틀어막고 있을 뿐이었다. 늑대는 곧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웩. 고급스러운 생크림 케이크 먹은 후에 지렁이 씹는 기분이야.”
젤리의 끔찍한 묘사에 해놔도 덩달아 속이 거북해졌다. 입 안에서 말캉한 무언가 꿈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젤리 씨! 뭐하신 거예요?”
그것도 사제 앞에서…! 헤나가 속삭이며 채근하자 젤리는 오히려 뻔뻔스럽게 나왔다.
“왜? 쟤가 자기 입으로 머리를 구경시켜준다고 했잖아?”
헤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나키르가 구경시켜주겠다 한 건 자신의 머리가 아닌 에반젤린의 머리였지만.
헤나도 나키르가 그렇게 말했던 걸 기억했다. 칼로 사람을 잔인하게 들쑤시고 난도질해가며 즐거운 듯이 말했었지. 나키르가 괘씸하게 느껴져 헤나는 결국 젤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나키르가 행한 폭력을 눈앞에서 피부로 선명히 체험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키르의 죽음은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였으니.
하지만 그 모습을 들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러다 들키면….”
“괜찮아. 다들 모르잖아.”
젤리가 어깨를 으쓱댔다. 그 말대로 다른 기사들은 나키르의 머리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잘린 단면에 대고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젤리가 그들에게 환각이라도 보여 주는 걸까? 그보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몸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라지 않았나?
“나도 오래는 못해.”
헤나가 답을 구하듯 바라보자 젤리가 변명하듯 내뱉었다.
“나도 무리하는 중이거든.”
“그럼 애초에 무리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잖아요.”
나키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면 굳이 환각을 보여줘 무리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순진하기는.”
헤나의 말에 늑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보란 듯이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자, 생각해봐. 애초에 그 꼴로 마리크 주교라고 속여봤자 누가 믿겠어? 옷차림은 물론이고 키부터가 다르잖아. 게다가 겁먹고 빌빌거리는 걸 마리크 주교라고 잘도 믿어주겠다. 난 하는 수 없이 손을 쓴 것뿐이라고. 이미 환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다 하나 추가되어 봤자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러니 젤리는 기왕 환각을 보여주는 김에 나키르를 곁들여 죽였을 뿐이다.
헤나는 젤리의 말을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 납득했다. 어쩐지. 헤나 자신도 마리크 주교 행세를 하는 게 불안한데 아무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했더니, 젤리가 몰래 수를 쓴 것이었다.
거기다 하루트마저 나키르의 목이 날아간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헤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모양이었고.
막 베일을 둘러 쓴 헤나를 보며 하루트가 마리크 주교와 비슷하다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 이었다. 헤나는 하루트의 시력을 의심했던 걸 사과했다.
“하지만 무리하시는 거잖아요. 이러다 힘이 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젤리의 능력이 끝나는 순간 기사들은 나키르의 잘린 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뽑은 검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자명했다.
“아직 신전이잖아요.”
헤나가 불안해하자 젤리는 이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나키르의 시체가 움직여 머리를 집어 들어 흙을 털어냈다. 그 이후 다시 머리를 자신의 목 위에 얹었다.
헤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게 젤리가 죽인 사람들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진 이유구나. 목에 남아있는 얇은 선만 아니라면 나키르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라헬은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걸. 오히려 내가 사제 이름을 건 범죄자를 잡아줬잖아?”
늑대가 으스대듯 말했다. 그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가장 배척받는 존재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헤나는 젤리의 말을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남의 상처를 짓밟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기쁜 듯 감상하던 모습이 선연했다.
칼을 꽂아 넣고 살을 헤집을 때마다 입꼬리가 찢어지듯 올라갔다. 고통에 찬 비명을 찬가라도 듣듯이 감상했고, 난자된 고깃덩어리나 다름없는 젤리의 모습을 담은 눈은 희게 휘었다. 헤나는 앞으로도 반달처럼 웃는 눈을 본다면 나키르를 떠올리게 될것이다.
헤나의 시선이 나키르에게 머물러 있자 기사들이 저들끼리 작게 수군대며 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나키르 경 말이야, 이번에 주교님의 눈 밖에 난 거 아닐까?”
“왜 아니겠어. 자기 감만 믿고 다짜고짜 가짜라고 의심하더니 마리크 주교님의 베일을 벗기려 들었잖아. 주교님께서는 이해해 주신다 하셨지만… 적어도 앞으로 주교님의 호위로는 못 서겠지.”
“아스타로트 경이 내쳐졌다고 자기가 무슨 주교님의 측근에 내정된 듯이 굴더니 꼴좋다.”
기사들은 나키르가 마리크 주교라는 기회를 놓친 것을 무척이나 통쾌해했다. 허구한 날 목소리를 드높이고 젠체하는 나키르에게 내심 반감을 품고 있다가 이때다 싶어 본심을 털어놓은 것이다.
반면 나키르의 줄을 탄 기사들은 나키르가 마리크 주교의 눈 밖에 났다가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닥칠까 걱정스러워했다. 거기다 나키르까지 조용하니 더욱 불안하게 짝이 없었다.
주위에서 숙덕대는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 노발대발해야 할 사람이 왜 이리 조용하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키르는 마리크 주교님이 혹시라도 자신의 충심을 곡해하실까 두렵다며 주변의 기사들을 들들 볶아 대더니, 마리크 주교의 앞이라서 얌전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가?
“나키르 경?”
다시 불렀음에도 반응하지 않자 기사는 아예 나키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 반동 때문인지 나키르의 몸이 휘청이더니 기껏 다시 얹어두었던 머리가 앞으로 쏠려 굴러떨어졌다.
줄곧 나키르를 보고 있던 헤나는 훤히 드러난 목의 단면을 보고 순간 숨을 들이켰다.
곧이어 무언가 헤나의 신발코를 쳤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헤나는 부릅뜬 두 눈을 마주치고는 그만 졸도할 뻔했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잘린 나키르의 머리가 헤나의 발코까지 굴러온 것이다.
얼굴은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죽은 탓에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듯해 보이는 평온하게 짝이 없는 상태라 더욱 기괴했다. 헤나는 순간 나키르의 머리를 발로 차버릴 뻔했다.
“이젠 제대로 고정도 안 되네.”
헤나의 뒤에서 젤리가 낭패를 보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말에는 기사들의 눈을 속이는 사술 뿐만이 아니라, 나키르의 몸을 고정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기사들은 굴러떨어진 머리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목 위가 없는 시체에게 여전히 말을 걸고 있었다.
나키르는 어설프게 몸을 삐걱거리더니 다시 헤나의 앞까지 걸어왔다.
“부를 때는 대답도 안 하더니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또 베일을 들치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나키르의 행동에 기사들이 수군댔다. 나키르는 쑥덕거림이 들리지 않으니 소란을 무시한 채 자신의 머리를 주워들어 목 위에 얹었다. 그리고 머리만 주워 얹은 다음 목적을 다했다는 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보고 있던 기사들만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나키르가 갑자기 마리크 주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나키르는 혹시라도 머리가 또 떨어질까, 머리를 양쪽으로 붙잡아 고정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마치 귀를 막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헤나는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조급하게 하루트를 불렀다.
“하루트 사제님.”
하루트가 헤나의 재촉을 알아차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운을 띄웠다.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요.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잡아놓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하하. 그럴 리가요…. 종탑은 모쪼록 잘 지켜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네, 물론이지요.”
하루트의 말에 기사들은 대단한 사명이라도 부여받았다는 양 고취되어 결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특히 헤나를 보는 시선들은 얼마나 선망에 가득 차 있는지, 속이 다 뒤집힐 지경이었다. 헤나는 맹목적인 시선에서 과거의 자신을 겹쳐보았다.
“나키르 경,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귀를 막고 계십니까?”
멀어져 가는 가운데 누군가 나키르에게 물어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어이 젤리가 부린 눈속임도 끝난 모양이다. 헤나는 마지막으로 나키르에게 눈길을 주고 발을 재촉했다.
누군가 나키르를 조금 전처럼 세게 밀친다면 이번에는 모두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머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트는 둘을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안내했다. 종탑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하루트는 베일을 도로 돌려받았다.
다행히 일전에 한번 나키르가 마리크 주교를 의심하다 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젤리가 보조한 덕분인지 사제들은 헤나의 조잡한 변장에도 잘 속아 넘어갔다.
“두 분, 뭘 그리 속닥거리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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