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답에도 공작은 미심쩍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대단한 방법을 쓰길래 맨날 멋대로 굴던 내가 자기 의사를 묻는지 궁금하단 투였다.
나는 공작에게 내가 무슨 방법을 쓸 건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공작은 예상했다시피 굉장히 분노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내 멱살을 잡지도, 물건을 던지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그의 풀리지 않는 분노를 대변했으나 별다른 방법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결국 기력이 빠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쥐를 잡을 수 있다고 약조할 수 있겠지?”
“네. 물론이고말고요.”
공작에게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설득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허락을 받았다. 이것도 다 나의 공작 공략하기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분이거니 했다.
이 기세를 몰아 하나 더 부탁하기로 했다. 저택 사람들을 도피시킬 곳이 있는지 물어야지.
“아, 그리고 하나 더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또 무엇이길래?”
“조부님께 듣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서요. 혹시 귀족 가문의 하인 전부를 숨겨도 좋은 도피처가 있을까요?”
내 물음에 공작이 팍 인상을 구겼다.
“나는 네게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 장소를 제공해 주겠다곤 하지 않았다.”
처음에 공작과의 약속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쥐를 잡아 주는 대가로 공작과의 대화 시간을 받아냈었지. 그런데 어디서 밑장빼기를 하시지? 단순히 시간을 받아내는 게 대가가 아니었을 텐데?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시나.
“조부님께서는 처음 저와 약속했던 걸 기억하시나요?”
“그래. 쥐를 잡아 주는 대가로 내 시간을 주기로 하였지.”
공작의 말에 난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아니요. 정확히 조부님은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로 하셨죠.”
정확히 내가 부탁한 건 그냥 시간을 달라는 것이 아닌, 아마란스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였다.
사실 공작에게서 듣는 아마란스의 이야기는 별로 영양가가 없었다. 공작의 중심은 아게라였고, 아마란스는 그 사랑의 부산물 정도 되는 위치였다.
딸에 대한 애정도 상대적으로 적은데, 더불어 공작은 로판에 흔하게 등장하는 ‘딸에게 매정하게 대했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공작이 회고하는 아마란스의 기억은 무척이나 희미하고 흐릿했다.
추억이란 폭신폭신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빠지다가 결국 늪처럼 가라앉아 흠뻑 흠뻑 취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공작은 메마른 대지가 따로 없었다. 그나마 내가 가스라이팅을 열심히 한 덕에 갈라진 금 사이로 물이 고인 것이고.
어떻게 빙의자인 나보다 아마란스에 대해 무지할 수가 있지? 가끔 나도 모르게 한심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고는 했다. 요즘은 폭군이나 흑막, 악당도 팔불출이 되어 육아하는 시대인데 공작은 유행도 못 따라왔다.
그래도 틈틈이 만나며 없는 사정에도 썰 풀이는 척척 진행되었다. 공작이 해 주는 이야기는 아마란스가 태어나던 시절부터 시작하여, 이제 나와 같은 스무 살이 되었다.
이야깃거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공작의 표정도 더욱 음침해졌다. 아마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에선 아마란스가 로한슨 백작을 만나게 될 거다. 그 이후로 절연을 했으니, 공작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다.
공작은 날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조금 전에도 ‘쥐’를 처리할 방법으로 한번 긁어댔는데 또 한 번 설전이 오가는 통에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았다.
“나와 말장난을 하는군.”
말장난하는 게 누군데 진짜. 공작한테 불만을 토하고 싶었지만 인내하며 설득을 이어나갔다.
“저에게 해 주기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내게 불순분자들을 숨겨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냐. 영토를 빌려 주었다 신전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고초를 겪는 건 너뿐만이 아니다.”
이 고집불통 염감탱이. 공략이 끝났으면 튕기지 말고 얌전히 손녀 바보처럼 굴란 말이야!
내가 최선을 다해 친절히 대해주고 있는데 공작이 좀처럼 넘어올 것 같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좋아. 강경하게 나가야겠다.
머금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굳이 손으로 매만져 확인하지 않아도 입매가 딱딱히 굳어진 게 느껴졌다. 나는 공작을 지긋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목소리가 꼭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탁이 아니라 대가에요 공작 전하.”
“…대가?”
애초에 아마란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한 것도 그냥 공작과의 공통화재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사실상 내게 돌아오는 이득은 없었다. 내가 ‘쥐’처럼 어머니에게 미쳐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공작 전하께서는 악마를 부릴 때 대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신 적 없나요?”
그러니까 내 말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이야기다. 악마를 부릴 때도 대가가 필요한데, 손녀를 굴려놓고서는 입 닦으려고 드시네. 양심 없는 할배 같으니.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 나름대로 공작 전하의 손녀에 걸맞게 굴지 않았나요?”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게라 님의 비위를 맞추며 수발을 들고, 하인들을 ‘쥐’로부터 지키며, 공작 전하와 호사퀸이 신전에게 으스러지는 일이 없도록 ‘쥐’까지 잡아 죽여주기로 했죠.”
이거 완전 호구 아니야? 새삼스럽지만 나 진짜 공작의 환심을 사려고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공작은 침음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땐 제가 더는 공작 전하의 손녀가 아니게 되겠지요. 공작저에 머무를 이유도 없으니 미련 없이 돌아갈게요.”
“아게라와 그 ‘쥐’를 그대로 두고 말이냐?”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공작이 거절한다면 그땐 그냥 절연하는 거다. 리틀 아마란스가 되어서 연을 끊을 거야. 신전에 고발당해서 아게라가 위험해진다 해도 모른 척하고 내 살길만 모색할 거다.
“물론 가설에 불과해요. 조부님께서 숨을 장소를 제공해 주신다면 전 계속 공작 전하의 손녀인 에반젤린으로 남아 있겠어요.”
“…일이 끝나고 나면, 적당한 곳을 일러 주겠다.”
공작은 나와 설전을 벌이다가 지쳤는지 끝내 내 손을 들어 주었다. 로한슨 사람들을 숨겨주었을 때 생기는 부담과 내가 아게라와 ‘쥐’를 두고 탈주했을 때 위험을 저울에 대보다가 추가 아게라에게 기운 것이다.
“너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아이구나.”
공작은 날 매도했다. 일부러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첫 만남에 와인 잔부터 던지던 관록 어디 안 가지. 역시 가족 후회물의 정석답다. 이제 와서 공작이 팔불출처럼 굴어도 캐릭터 붕괴일 거다.
“어머. 언제는 사랑하려고 노력이라도 하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내 말에 공작은 자기가 더 상처받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공략 완료된 주제에 새침을 떨어대셨어요.
***
호사퀸 공작가의 안주인, 아게라 호사퀸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퍼졌다.
“세상에, 우리 마님 어쩌면 좋아.”
공작가의 하인들이 무척이나 술렁였다. 공작가에서만큼은 에반젤린 로한슨이 마녀라는 소문보다 아게라의 건강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오히려 에반젤린이 아게라의 간호에 전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 로한슨 저택을 에반젤린이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는 다 오명이라며 화를 낼 정도였다.
아게라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무척이나 빨리 퍼졌다. 소문에 발이 달렸다면, 무려 천리마의 발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수도로까지 퍼져나가 호사퀸 가문에 관심이 없는 저잣거리의 아이들까지 호사퀸 부인의 중태를 알 정도였다. 호사퀸 공작가 사람들은 소문이 빨리 퍼진 이유가 그만큼 호사퀸 공작가를 주시하는 눈이 많기 때문이리라 여겼다.
그 소식은 아게라의 사랑하는 딸, 유일한 딸, 리코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는 ‘쥐’에게도 들어갔다.
로한슨 저택을 태우는 것으로 복수를 한 쥐는 마리크 주교를 피해 도망간 후 근처를 돌며 배를 채우곤 했다. 악행을 저지를 땐 꼭 에반젤린의 외형을 따라 했는데, 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에반젤린에게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에반젤린을 흉내 내는 데는 반발이 돌아온다. 뼈에 각인된 관념이 감히 에반젤린에게 해를 끼친다며 반발하기 때문이다.
‘쥐’가 직접 에반젤린을 해하는 대신 로한슨 저택을 찾아가 화풀이를 한 것도 직접 손을 대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에반젤린을 따라 하는 것은 그토록 고통스러웠으나 그의 질투는 피부에 새겨진 경전을 이겨낼 만큼 질척거렸다.
그 악독함이 아게라가 위중하다는 말에 단박에 무너져내렸다.
“세상에, 어머니가 위독….”
“로한슨 영애가 아니라 네가 아게라 님의 간호를 해야지.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자.”
쥐가 자기의 몸으로, 에반젤린의 형태를 꾸며내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꼴을 지켜만 봐야 했던 리코가 냉큼 집으로 돌아가자며 부추겼다.
“그래. 가자.”
쥐는 지체 없이 호사퀸 공작가로 향했다.
쥐는 그때까지도 에반젤린의 외형을 흉내 내는 중이었다. 호사퀸 공작가의 하인들은 로한슨 영애가 잠시 외출하다가 오셨겠거니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쥐는 어머니의 하인들을 죽이지 않고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곧장 저택에 들어간 쥐는 리코의 기억을 더듬어 아게라의 방으로 달려갔다. 에반젤린이 아게라를 간호 중이었으니, 방에 갔다가는 분명 맞닥트릴 게 분명한데 아게라에게 정신이 팔린 탓에 그것까지 고려할 수 없었다.
쥐는 아게라의 방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기억을 더듬으며 얼굴을 다시 가다듬었다. 로한슨 저택을 불태우면서, 우연히 아마란스의 그림을 보았다.
열댓 개는 되어 보이는 그림들은 모두 같은 얼굴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쥐는 본능적으로 그림의 주인이 제가 모방해야 하는 원형임을 알아차렸다.
쥐는 그림을 눈에 잘 새긴 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세상에 어머니의 딸은 자신 하나뿐이었으므로, 아마란스의 그림 따위 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로한슨 저택에 불을 질러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해서 쥐는 그림을 흉내 냈다. 이전에 엉성하고 부족했던 모습보다 훨씬 아마란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게라, 내 어머니. 아마란스에요. 아마란스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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