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달라고 비는 소리가 심장을 찔러 댔다. 죽어 가는 사람을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마치 무력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직 가브리엘이 자신은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아주 어린 시절, 그는 달려오는 마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었다.
“넌 상처가 잘 낫지 않으니까 다치면 안 돼.”
그러나 평소 자신을 잘 챙겨 주었던 두 살 위의 아이가 가브리엘을 밀치고 대신 마차에 치였다. 가브리엘은 아이를 업고서 어른들에게 살려 달라고 도움을 청해 봤지만, 흔쾌히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뒷골목으로 봉사를 다녔던 자바니야 주교만이 뒤늦게 아이의 장례를 치러 주었을 뿐이다.
살려 달라고 다 쉰 목소리로 조용히 외치는 예레미아의 모습은 과거의 가브리엘과 닮아 있었다. 가브리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아의 손을 잡아 주고 싶은 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예레미아는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살아남고 싶으십니까?”
“그래…!”
예레미아는 가브리엘의 물음에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이며 다 쉰 목소리로 절박하게 소리쳤다. 처절하게 살아남고 싶었다. 믿었던 가족에게, 신에게 배신당했다는 게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악마의 손을 잡아서라도요?”
“악마…? 오히려 반길 일이지….”
악마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오히려 반겨야 했다. 태양신의 현현이라는 마리크 주교와 그녀의 기사에게 상처를 입었는데 그들이 믿고 따르는 라헬 신을 계속 믿고 있을 필요는 없지. 신을 배신한 벌인지 예레미아의 눈이 점점 감겨왔다.
가브리엘은 예레미아의 의지를 듣고, 죽어 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감흥이 없이 하품을 하는 젤리를 불렀다.
“젤리 씨. 당신이 여기 있다는 말은… 로한슨 영애도 함께 계신다는 말이겠죠.”
“당연하지. 주인님 아니었으면 내가 왜 왔겠어?”
가브리엘은 토텐 후작가에서 라이더를 보았다. 토텐 부인은 말하기를 꺼리며 숨기려 들었으나, 라이더는 성수가 통하지 않는 체질인데도 불구하고 승마를 할 정도로 건강해진 것을 보면 로한슨 영애의 은혜를 입어 회복한 게 분명했다. 애초에 에반젤린 로한슨 스스로가 성수가 통하지 않는 몸을 회생시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에반젤린은 예레미아를 살릴 방법을 알지도 몰랐다.
“…로한슨 영애.”
가브리엘은 꿈속 어린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새하얀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네, 경. 부르셨나요?”
그러자 마법처럼 에반젤린이 대답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나 착각할 만큼 꿈결 같은 목소리다.
언제부터 곁에 있었던 걸까. 꼭 가브리엘이 불러주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빠르게 돌아온 대답에 가브리엘은 믿기지 않아 다시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에반젤린.”
“네. 가브리엘 경.”
에반젤린은 번거롭지도 않은지 다시 부름에 응답해주었다. 어쩐지 심장이 벅차올랐다. 감옥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시와 눈들을 피해 가브리엘의 눈앞에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은 잠시 뒤로 밀어두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먼저 불러주셨으면서 놀라시는 건가요?”
에반젤린이 귀여운 것을 본다는 듯 웃었다. 자애롭게 미소 짓는 모습은 가브리엘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뤄 줄 것만 같았다. 한때 보는 것만으로도 괴리감이 느껴지며 인간을 낮잡아 보는 게 선명히 드러나던 에반젤린은 이제 제법 상냥한 흉내를 잘 냈다.
“부디… 황녀님을 살려 주십시오.”
내려앉은 어둠 속에 에반젤린 로한슨은 홀로 반짝였다. 새하얀 드레스, 바람에 흩날리는 흰 머리카락. 언젠가 에반젤린의 하녀인 칸나가 그를 꼬집었던 말이 떠올랐다. 에반젤린을 천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냐고 했지. 그럴 리가.
“경이 바라신다면요.”
가브리엘의 악마가 자애롭게 웃었다.
***
푸딩이 천리안으로 테네브레이를 찾아 놓고 혼자 성급하게 먼저 가 버렸다.
“주인님. 쟤 혼자 갔는데요.”
나도 알아…. 젤리랑 나는 허망하게 푸딩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아니, 찾았으면 적어도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푸딩이 어려서 그런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 원래 애들은 심부름도 자기 혼자 해 보겠다고 나서는 게 보통이긴 하지. 아까 자기 힘으로 테네브레이를 찾아보겠다고 끙끙 앓으면서 무리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뒤따라가자.”
그래도 젤리라도 같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젤리가 손을 튕기자 푸딩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나랑 젤리만.
“안테 경은?”
“감옥을 지킬 사람도 있어야죠.”
그러긴 하네. 감옥에 내 드레스가 남아 있으니까 안테 경이 재치 있게 드레스를 입고 나인 척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로판 소설에 이런 에피소드는 꼭 있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숲?”
우리가 이동한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푸딩은 테네브레이를 찾아서 이동했을 텐데 정작 테네브레이는 또 도망친 것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숲이라니…. 테네브레이가 그 짧은 사이에 황궁을 벗어났나 보다.
이렇게 뛰어난 도주 능력은 친아빠를 살해할 때 쓸 게 아니라 도망 여주로 쓰였어야 빛을 발하는 거였다며 아쉬워하려는데 시야 한편에 익숙한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황궁을 벗어난 게 아니라 그냥 뒷마당에 있는 숲이었다. 방금 도망 여주를 했었어야 했단 말 취소할래. 고작 도망간 게 뒷마당이었다니. 남주한테 하루도 못 가서 잡히게 생겼네.
그래서 테네브레이는 안보이고, 푸딩은… 푸딩도 테네브레이를 쫓아간 건가? 젤리를 앞장세워서 푸딩의 흔적을 쫓아 뒤따라갔다. 숲이 꽤 넓어서 찾기 어렵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푸딩을 찾을 수 있었다.
“푸딩.”
“가까이 오지 마세요.”
테네브레이는 찾은 건지 물으며 가까이 다가가는데 푸딩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방금은 혼자서 사라지더니 이제 다가오지 말라고? 우리 고양이가 사춘기인가 봐! 내가 푸딩을 낳지도 않았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차올랐다.
반려 수인 애지중지 키워 봤자 아무 쓸모 없어. 상처받아서 입을 꼭 다물고 조용히 있으니 푸딩만 있던 게 아닌지 수풀이 헤쳐지며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테네브레이인가 싶었는데 수풀 사이로 나타난 건 웬 훤칠한 남자였다. 가브리엘이랑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성기사 같았다.
“어디서 귀여운 방울 소리가 난다 했더니 역시 너였어. 용케 내가 있는 곳을 찾았구나?”
남자가 푸딩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었을 때는 교회 오빠같이 생겼는데 웃자마자 입 안에서 날카로운 이와 갈라진 혀가 드러나 인상이 180도 변했다. 단정하게 잘생겼던 인상이 확 바뀌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멍청한 거지.”
푸딩도 이를 세우며 경계했다.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남자의 등장과 함께 내게도 비린내가 맡아졌다. 남자가 든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 저기서 나는 냄새인 게 분명했다. 힉, 어디서 누굴 베고 온 거람.
“너도 짐승 냄새 풍기는 건 마찬가지야. 게다가 뭘 처먹은 건지 썩은 내까지 나네.”
남자의 말에 순간 발끈했다. 썩은 내라니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야! 우리 애들은 로한슨 저택 하인들이 영혼을 담아 씻기고 빗겨서 향기롭기만 한데! 푸딩이랑 젤리는 살아 있는 고체 향수거든? 남자가 든 칼이 무서워서 속으로만 열심히 반박했는데 푸딩은 아직 어려서 겁도 없는지 계속 비아냥거렸다.
“입 다물어. 비린내보다는 차라리 썩은 내가 낫지.”
“너답지 않게 말싸움이나 하면서 혀만 놀리는 건 네 주인 때문인가?”
짐승 냄새 운운하고 방울 소리를 언급하는 걸 보면 푸딩이랑 젤리가 수인이라는 걸 잘 아는 동족인 건 확실한데, 그런 것 치고는 사이가 무척 험악했다.
애초에 왜 여기 있는 거지? 지금 숲에 있는 걸 보면 테네브레이를 쫓는 쪽이거나 반대로 돕는 쪽 같은데…. 어느 쪽인지 가늠하고 있는데 남자의 시선이 나한테 휙 돌려졌다. 깜, 깜짝이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정중한 척 인사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아자젤 아스타로트라고 합니다.”
방금 푸딩한테 건방지게 말하는 걸 들어서 그런지 예의를 차리는 게 오히려 느끼했다. 가브리엘이랑 비슷한 말투인데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가브리엘은 남주 버프 덕분인지 담백한 맛이 있지. 아자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핏자국이 떨어져 궤적을 남겼다.
“스쳐 지나갈 때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가까이 보니 영애님은 저희 같은 것들에게 더욱 자극적이네요. 왜 플라우로스가 꼬리를 말고 복종하는지 알겠어.”
플, 플라우… 뭐?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다. 게다가 갑자기 무슨 되지도 않는 플러팅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반존대는 그렇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
아자젤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려는 듯 손을 뻗었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푸딩이 성을 내며 달려들고 젤리도 막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만.”
내 목소리에 맞춰 아자젤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오던 푸딩과 젤리의 움직임까지 멈췄다. 날 걱정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스스로 쳐낼 수 있는데 둘 다 과민반응이다. 나도 호신술 정도는 할 수 있었거든.
내 머리카락을 만지려던 아자젤의 손목을 꽉 잡아 쥐자 아프다며 엄살을 부렸다.
“윽, 무슨 힘이….”
아프기는. 수인들은 하나같이 엄살이 심한 거야 아니면 고통의 역치가 낮은 거야. 손에 힘을 더욱 세게 주었다.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하는 게 언짢아서 한마디 해야겠어.
“넌 푸딩과 동족이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대충 뭉뚱그리는 걸 보니 같은 고양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혀가 갈라져 있으니 뱀인가?
“그런 주제에 왜 내게 건방지게 구는 거지?”
내가 푸딩이랑 젤리 보호자잖아. 친구 보호자한테 건방지게 플러팅이나 해 대고 말이야 이 자식아. 확 술을 담가 버릴까 보다.
눈싸움하듯이 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데 팩폭에 당황했는지 아자젤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네가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지? 이제 좀 알아들었으려나 싶어서 손을 놓아주자 아자젤은 뒷걸음질 치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너무 충격받아서 미친 건가?
“하하, 하하핫…. 진짜 대단하시네.”
아자젤은 한참을 웃고 나서야 웃음을 멈추고 다시 정색했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내가 도나우를 상대로 악녀 열연을 펼칠 때 써먹었던 방법이랑 비슷했다. 도나우가 그때 이런 심정이었나? 당해 보니까 되게 무섭네….
“왜 이 녀석들이 당신께 배를 까고 복종하는지 잘 알겠어. 그런데 내가 이빨 빠진 저 녀석들이랑 같은 취급 당하기는 억울하거든. 난 내 머리 위에 누가 있으면 꼭 끌어내리고 싶어지더라.”
이제 알겠다. 푸딩은 사춘기라면 아자젤은 중2병이었다. 사실 뱀 수인이 아니라 흑염룡으로 진화하기 직전의 이무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난 사람을 갖고 노는 쪽이지 지배당하는 건 딱 질색이에요. 그래서 지금 당장 당신을 먹어 치워버리고 싶은걸… 내 전력을 다하면 그래도 그 예쁜 그릇에 금이라도 가지 않겠어?”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내게 겨누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자젤이 섬뜩했는데 지금은 무섭기는커녕 조금 부끄러워졌다. 친구야, 공감성 수치라고 들어봤니? 내가 지금 그게 바닥난 것 같거든. 누가 접힌 손발 좀 다시 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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