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 어시스트. 푸딩에게 마음속으로 엄지를 척 세웠다.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방비 없이 내보냈다간, 이 의사가 신전을 찾아갈지도 몰랐다.
애초에 가브리엘을 치료하는데 손을 보탤 사람을 내보낼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 사전에 싹을 도려내는 건 공작이 했던 짓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이상한 걸 닮아버렸다.
어린 의사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내 손이 닿자 겁을 먹은 듯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내가 무섭기는 하나 보네. 좋아, 그럼 이대로 가자. 오랜만에 악녀다운 면모를 잔뜩 보이기로 했다.
“이름이 뭐지?”
한차례 소개를 들었으나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칼미아뿐이었다. 이름을 다시 묻자 어린 의사가 이를 악물며 답했다.
“…히솝입니다.”
“그래, 히솝.”
손에 힘을 주어 히솝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당장 사람을 주저앉힐 정도로, 하지만 정말 쓰러지지는 않도록 꽉 힘을 줬다. 그리고 눈을 파헤칠 듯이 뻔히 바라보았다.
히솝은 공포에 질린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간헐적으로 사시나무 떨리는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신전으로 가서 파라로스 기사단의 단장인 가브리엘이 호사퀸 공작저에 있다 고해할 셈인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방금 네 입으로 신전에 가서 일러바치겠다고 고백한 거 아닌가?”
“제가 언, 언제 일러바치겠다고 했나요…!”
“방금 그렇게 말했잖니.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거기에 확인사살을 날리라고요? 그것도 이단 학살이 한창인 지금요? 전 죽기 싫습니다.’라며. 참 이상하지. 이단으로 몰려 죽는 것은 무서워하면서, 난 두렵지 않니?”
고저 없이 히솝이 내뱉었던 말을 그대로 읊어 주며 협박을 덧붙였다. 히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애초에 가브리엘 경이 앓아누우신 걸 아는 건 우리뿐인데, 누가 말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신전의 귀에 들어가 이단으로 몰려 죽겠어?”
“전 결코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 전 환자의 사생활을 내다 파는 놈들이랑은 다르단 말입니다!”
히솝은 억울해하는 투였다. 그 말을 들어보면 의사 중에서는 환자의 병증을 정보로 취급해 팔아먹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이단이라며 신전에 정보를 주었을 게 분명했다.
히솝은 딱 보니 그런 자들을 혐오하는 듯했는데, 같은 부류로 묶이니 화를 낼 만했다. 히솝이 무고하다는 건 나도 잘 알았다.
공작이 알선해 주었고, 아게라의 일도 비밀로 잘 지키고 있던 의사였으니까.
“우리 사이에 신뢰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믿지?”
하지만 가브리엘이 감옥을 벗어났다는 걸, 하물며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자를 밖에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히솝이 벗어날 수 있는 건 가브리엘이 낫거나, 마리크 주교가 몰락한 다음이다.
“멋대로 데려와 놓으셔 놓고…!”
“말은 바로 해야지. 너흴 데려온 건 조부님이시지. 게다가 문을 열기 전 나는 분명 경고를 했고, 그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건 바로 너였어.”
히솝은 말을 잃었다. 그 말대로 난 나름대로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벗어나고 싶다면, 가브리엘 경을 살려. 무조건.”
히솝은 입을 다물었다. 공작가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가브리엘을 치료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제가 만약 기사단장께 수를 쓰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대에 대한 신뢰는 없지만, 히솝, 네가 치료사라는 건 잘 알아. 긍지를 아니 환자에게 괜한 수를 쓰지는 않을 테지.”
물론 이것 역시 히솝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히솝을 알선해 준 공작에 대한 신뢰에 가까웠다. 공작이 아게라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종자를 살려둘 리 없지 않은가.
히솝은 개인에 대한 신뢰는 없으나, 의사로서는 믿는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려대는 이상한 얼굴을 해댔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주억였다.
“만약… 기사단장을 치료해 낸다면 제게 사, 사, 사과를….”
“사과 대신 감사를 전하지.”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히솝은 고맙다는 말을 듣는 걸로도 충분한지 수긍하고 꼬리를 말았다.
히솝은 내게 눈을 돌리고 본업에 전념하려는 듯 가브리엘을 살피기 시작했다. 배턴 터치를 하듯 히솝에게 자리를 넘긴 칼미아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방금 언쟁을 한 걸 보고서 내가 무섭지도 않나 보다.
“히솝을 길들이신 건 잘하셨습니다.”
칼미아가 간신배처럼 달라붙어 내 선택을 추켜세웠다.
“그래 보이진 않아도, 저희 중 가장 실력이 좋은 게 히솝입니다.”
그건 꽤 놀랄 말이었다. 클리셰적으로는 괴짜인 칼미아가, 연륜으로는 노인이 가장 의학적 지식이 뛰어날 줄 알았다.
“아니라면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어요.”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치료하는 걸 지켜보니 칼미아의 말이 맞았다. 히솝은 실력이 좋았다. 특히 약초로 약을 제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왜 신전에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하면서 히솝을 몰아세우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만이 하사할 수 있는 은총인 성수에 히솝의 제조약이 도전장을 던지는 것으로 보였을 거다. 성수만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위업에 금이 갈 테니까.
셋이 달라붙어 밤을 꼬박 새운 덕에 다음 날 아침에는 가브리엘의 열이 떨어졌다.
한시름 돌렸으니, 이제 가브리엘을 핑계로 눈을 돌렸던 것들을 마주할 차례였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한 아게라와 어제 하루 종일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었다는 마브카 말이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으나 가브리엘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내 방문 앞에 서 있는 마브카를 마주쳤다.
헤이즐이 낭패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하필 옆 방이라. 마브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문짝을 노려보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 냉큼 달려들었다.
“마브카!”
헤이즐은 여전히 마브카를 말리지 못했다.
“영애님이 엄마를 데려간 거죠!”
마브카는 옴팡진 손으로 나를 마구 때렸다. 서럽게 우는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솜방망이와 다를 바 없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이를 매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어딨어? 엄마…!”
서글프게 리코를 찾는 아이에게 리코가 가브리엘을 대신해 감옥에 갇혀있다는 설명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마 돌려줘…. 마브카 엄마 돌려주세요….”
날 때리는 힘이 점점 약해지더니 마브카는 결국 내 드레스 자락을 꽉 붙잡고 내게 매달려 눈물을 펑펑 흘렸다. 푸딩이 애가 우는 모습을 질색하며 보고 있다 물었다.
“기억을 지울까요? 슬퍼할 거라면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망각은 축복이었다.
푸딩의 말에 잠시 솔깃한 것도 사실이나 고개를 저었다. 마브카를 이 이상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마브카는 내가 공작저에 남기로 한 이유였다.
그러나 외람되게도 저택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마브카가 가장 불행해졌다. 어머니의 부재를 대체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과연 보상할 수는 있는 건지 고심에 빠질 때였다.
푸딩의 품속에서 작은 덩어리가 바스락거리더니 마브카에게 달려들었다. 리코의 손가락이 변했던 쥐였다.
뭔가 감이 오는 듯해 푸딩이 쥐를 제압하려 드는 걸 막았다. 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마브카의 다리를 콕콕 찔렀다.
“쥐?”
쥐에 대해 좋은 추억이라곤 없는 마브카가 겁을 지체 먹고 내게 안아달라는 듯 매달렸다. 그러다 쥐가 말을 꺼내자 마브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 브카….”
“…엄마!”
쥐에게서 나온 소리는 분명 리코의 목소리였다. 전화기 대용이라더니 진짜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였네. 심지어 리코의 신체 일부라서 그런가, 시야까지 공유가 되나 보다.
마브카는 쥐를 보고서 리코라며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의 상상력인지, 아니면 쥐를 아마란스라고 여겼던 아게라처럼 리코가 마브카에게도 능력을 쓴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리코는 마브카의 몸을 올라타 어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브카의 귓가에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했다.
“마브카. 영애님을 곤란하게 하면 안 돼. 왜냐하면, 엄마는 엄청나게 비밀스러운 작전을 위해 숨어있거든.”
“비밀스러운 작전?”
“응. 예전에 마브카가 한 것처럼.”
신전에서 공작가의 정보를 빼돌리려 마브카에게 접근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마브카는 리코의 말에 속절없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엄마가 없다고 해서 마브카가 막 울고 그러면 안 돼. 마브카가 울면 엄마는 걱정돼서 비밀 작전에 실패할지도 몰라.”
“비밀 작전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데….”
마브카가 어느덧 눈물을 그치고 훌쩍이며 답했다.
“그럼 엄마가 비밀 작전에 성공하려면 마브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울지 말고, 영애님 말씀 잘 들어야 해!”
“그래. 잘 아네. 착하지, 내 사랑하는 딸.”
리코의 속살거림에 마브카가 햇살처럼 웃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어른들은 날 포함해서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쥐는 그 작은 발로 마브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방울에 털이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그럼 엄마는 언제 돌아와?”
혀에 기름칠한 것처럼 유연하게 나오던 답이 뚝 멈춘 것은 마브카의 질문이 끝난 이후였다. 리코는 잠시 망설였고, 그 대답을 한 건 나였다.
“열 밤만 자면 돌아올 거야.”
마브카가 제 양손을 쫙 펴서 내게 뻗었다. 숫자 열이 제 양손을 펼친 손가락만큼의 수가 맞냐는 물음이었다.
“맞아. 손가락 열 개만큼.”
리코는 죽으러 간 저를 두고 돌아온다고 답한 내가 이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딸에게 괜한 허풍을 떨며 기대를 하게 만든다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브카의 어깨에 올라와 있던 쥐가 후다닥 내려와 내 위로 올라가려 들었다.
“이게, 어딜.”
푸딩이 눈을 찡그리며 쥐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쥐가 낑낑대자 푸딩이 한숨을 내쉬며 쥐를 손바닥에 올리고 내 귓가에 가져다 댔다. 쥐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거예요.”
거짓말이라…. 양손을 접어대며 수를 세느라 쥐가 내려갔는지도 모르는 마브카를 눈에 담으며 말을 돌렸다.
“아게라 님의 기억이 돌아오셨어.”
“…아게라 님이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조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확실하겠지.”
“그럼….”
리코가 잔뜩 기대에 차 말끝을 흐렸다.
“아게라 님이 리코 널 기억하고 있는 이상, 네가 쥐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일은 없어. 그러니 죽을 필요도 없다는 거지.”
물론 공작과는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내 독단적인 선택이었다.
“…….”
리코는 말을 잃었다. 죽이려 들었다가, 쓸모 있게 이용한다면서 사지로 밀어 넣어놓고 이제 와 살아남으라고 하니, 리코 입장에선 변덕스러운 내가 원수가 따로 없겠지.
“다시 데리러 갈 테니 버티고 있어, 리코.”
리코는 말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쥐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리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칸나가 노크도 안 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전에 히솝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로한슨 영애님! 가브리엘 경이 눈을 뜨셨습니다!”
Comentá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