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의 말을 듣고 보니 전화기 대용이란 말이었다. 푸딩은 싫어하는 티가 역력하면서도 쥐를 차마 내게 쥐여주긴 싫은지 자기가 쥐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와 내게 기대어 있는 가브리엘도 부축해 안아 들었다.
나는 원체 힘이 좋았고, 성인 남자 정도야 가뿐히 들 수 있었지만, 나에게 유독 헌신적인 푸딩은 날 고생시키는 법이 없었다.
로판 1호 공주님 안기는 푸딩과 가브리엘이 차지했다. 푸딩도 수인인지라 힘이 좋은지 가브리엘을 들고서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 속임수였다.
보니까 손과 가브리엘 사이가 띄어 있었다. 염력으로 가브리엘을 띄우고 있는 거였다. 그럼 굳이 공주님 안기 자세를 할 필요가 있나?
대체 왜…? 혹시 가브리엘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아마도.
***
가브리엘을 데리고 호사퀸 공작저로 돌아왔다. 공작은 돌아온 면면 중에 리코가 없다는 걸 보고 잠시 침음했다. 가브리엘을 대신해 사지로 들어갔다는 걸 실감하니 그답지 않게 안타까운 마음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리코를 죽음에 몰아넣은 데에 일조한 것 같아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아니면 그저 내가 느끼고 있는 불편한 심정을 공작에게 대입하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공작에게 가브리엘이 머무를 방을 내어 달라고 했다.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굳이 가브리엘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기에, 될 수 있으면 인적이 없고, 접근이 어려운 곳이면 좋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공작은 내 옆방을 추천했다. 하긴…. 공작저에 막 왔을 때는 세기의 악당 취급을 받으며 피해졌고, 성수를 펑펑 뿌리고 나서는 예의를 차린다며 내 앞에 알짱거리지 않았으니 가장 접근이 어려운 곳이긴 했다.
가브리엘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가, 공작저에 온 것을 확인하고 다시 쓰러졌다. 열이 잔뜩 올라 몸이 불덩이였다. 여태까지 감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가브리엘이 식은땀을 흘리며 앓아대자 가만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치료사가 필요해요.”
호사퀸 공작을 찾아가 의사를 요구했다.
공작은 내 말을 듣자마자 당장 치료사들의 프로필을 쫙 뽑아 넘겨주었다. 꼭 미리 찾아놓은 것 같아 상상 이상의 재빠른 일 처리에 감탄하며 고맙다고 하자 공작이 덧붙여 말했다.
“…아게라를 위해 찾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얼굴이 굉장히 묘했다.
“하나같이 아게라를 치료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던 놈들이다. 하나, 네 기사에게는 쓸모 있을 수도 있겠지.”
의사들이 아게라를 치료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성수가 없던 원래 세계에서도 치매는 완치할 수 없는 질환이었다.
이 세계에는 성수라는 치트키가 있었고, 그만큼 의사들의 입지도 적었다. 의사들은 주로 성수를 사들이기 어려운 평민들을 진찰했고, 대부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도 외상이었다.
그런 의사들이 아게라의 치매를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이 무거운 자들이 있다. 그자들을 불러주마.”
공작은 그중에서도 유능한 사람 몇 명을 꼽았다.
아게라를 진찰하고도 병증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지 않은, 입이 무거운 자들이니 가브리엘을 보여 줘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들의 입이 무겁다기보다는, 애초에 공작부인이 광증을 앓는다며 말한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있었다면 진작 공작이 손을 썼겠지. 아무튼, 공작이 베푼 뜻밖의 배려가 놀라웠다.
“…조부님께서 당장 가브리엘 경을 내쫓으라 엄포를 놓으실 줄 알았어요.”
로한슨 저택 사람들을 숨길만 한 장소를 알려 달라 했을 때도 날을 세웠던 공작이 아닌가. 이렇게 의사를 바로 소개해 줄지 몰랐다.
더군다나 공작은 성기사를 성수로 치료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의사를 찾는 이유에 대해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원래의 공작이었다면 아게라와 공작가가 위험에 처할만한 빌미를 제공할 가브리엘을 당장 내쳤을 텐데….
혹시 전에 가브리엘에게 쥐를 제압할 방법과 성수를 제공받은 은혜 때문인가? 아니, 그렇다기에 공작은 은원과 계산이 까다로운 작자였다. 가브리엘과의 거래는 나를 공작저로 데려와 보호해 주는 것으로 충분히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자 공작은 뜸을 들이다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네가…. 꼭 과거의 나 같구나.”
“…….”
그러니까 가브리엘에게서 아게라를, 내겐 공작 자신을 겹쳐보았다는 말이다. 결코, 날 아끼지 못할 것 같다면서 자기를 겹쳐보는 건 참 잘하시네.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부끄러웠는지 금방 말을 돌렸다.
“더군다나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정당한 대가를 내놓으라고.”
대가? 내가 공작이 흔쾌히 내게 협조할만한 일을 했나? 혹시 쥐를 전부 처리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그 대가는 로한슨 저택 사람들을 빼돌릴만한 장소를 알려 주는 거로 끝나는 거 아니었어? 의문을 토하기도 전에 공작이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가브리엘 경을 데리러 갔을 때…, 아게라를 찾아갔다.”
아게라를 미끼로 써 쥐를 잡았으니 아게라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러 간 것이 분명했다.
공작은 날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늘 기저에 벽을 세워놓고 있던 사람에게서 은근한 호의가 느껴졌다. 아니, 날 사랑할 수 없을 거라면서 츤데레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아게라에게 무슨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건가?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게라의 기억이 조금 돌아왔더군.”
아. 공작이 말을 한순간 잠들기 전에 리코를 알아보았던 아게라가 떠올랐다. 아게라가 기적적으로 리코를 알아본 게 한순간의 꿈은 아니었나 보다. 온전히 기억이 돌아온 건가? 나조차도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공작은 아게라가 기억을 되찾은 것이 내 수완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금 공작 안에서 내 입지는 딸에게 기생했던 악마 같은 손녀가 아니라, 아내의 은인으로 격상한 모양이다. 핏줄보다 은인이 대우가 좋다니 이것 역시 공작다웠다.
나는 딱히 아게라를 치료하기 위한 일은 한 적이 없으나 공작의 오해를 정정해 줄 이유는 없었다.
“기억은 어느 정도로 되찾으셨나요?”
“대부분의 일은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아마란스가 죽은 것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잠시 걱정이 되었다. 아게라는 원래도 정신력이 약해 보였다.
기억을 되찾고, 죽은 딸을 그리워해, 되살리려다 악마를 불러냈고. 그 악마가 수십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갔음을 깨닫고 다시 정신을 놓지는 않았을까? 공작은 몰라도 어쩌면 아게라에겐 프릴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양산 아래서 정원은 노니는 것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몰랐다
망각은 축복이니까.
“…아게라가 네가 보고 싶다더구나.”
“제가 아마란스가 아닌 에반젤린 로한슨이라는 걸 아시면서도요?”
“그래. 아마란스의 딸을 보고 싶다고 했어.”
아니면 한차례 앓았다 내성이 생겼을 수도 있고. 공작은 당장 내가 아게라를 만나주길 바라는 투였다.
“…나중에요.”
약간 망설여졌으나 만남을 미루었다. 여태 아게라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인 척하며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기억을 되찾았다면 상황이 달라지는 법이다. 공작도 처음에 내게 와인 잔을 던졌는데, 아게라라고 딸인 척 연기했던 날 반길까?
공작은 내 고집을 들어주었다. 아게라가 보고 싶다고 강압적으로 끌고 가지 않고 내 핑계를 봐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우선 가브리엘 경부터 치료하고 싶어요.”
공작은 그날 밤 당장 의사들을 납치하듯 데려왔다. 공작의 부름에 응한 사람은 세 사람이다. 중년의 여인, 노년의 남자,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
셋은 전에도 공작에게 휘둘린 전적이 있어 자세한 설명도 없이 끌려왔는데도 여유가 넘쳤다. 그 여유도 날 앞에 두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헉! 로, 로한슨 영애님.”
공작을 앞에 두고서도 떨지 않더니 내가 더 무섭나 보다. 그나마 중년의 칼미아라는 사람은 날 보고도 흥미로워하며 눈을 빛냈다.
“오…. 정말 소문의 로한슨 영애님이신가요?”
“그래.”
괴짜 같았으나, 클리셰대로라면 저 전두엽이 어설퍼 보이는 칼미아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다. 그래서 나무라지 않은 것인데 나 대신 다른 의사들이 칼미아를 말렸다.
“…돌았나, 자네? 입조심 해!”
“왜요? 혹시 무섭나요? 저희가 필요해서 부르셨을 텐데, 쓸모 있는 사람을 죽일 리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쓸모가 없어도 죽이진 않는데…. 그래도 칼미아의 튀는 행동 덕분에 다른 둘도 긴장을 푸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들을 데리고 가브리엘이 머무는 내 옆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의사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
“여기서 본 것은 절대 밖에서 이야기하지 말렴.”
셋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미아도 긴장이 되는지 장난 같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서서히 문을 열고, 의사들은 방 안에 있는 가브리엘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우와…. 어떻게 살아계시는 겁니까?”
칼미아는 능숙하게 가브리엘을 진단하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다른 반응도 있었다. 환자가 가브리엘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어린 의사는 불만을 금치 못하고 툴툴대기 시작했다.
“아니, 기사단장이라면 저희에게 맡길 필요도 없이 성수를….”
칼미아가 저래 보여도 눈치는 있는지 어린 의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애초에 성수가 통했다면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을 거다. 어린 의사는 곧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공작부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치매는 생각보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평민 사이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신전의 기사, 하물며 기사 단장이다. 기사단장이 태양신을 속이고, 저주받은 몸으로 신전에 들어간 것은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는 극중한 죄였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신을 속여먹는 역천의 기사를 치료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린 의사는 불경함을 견디지 못하고 짐을 챙기고 나가려 들었다.
“저, 저는 못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성수를 써서 치료하지 않는다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거기에 확인사살을 날리라고요? 그것도 이단 학살이 한창인 지금요? 전 죽기 싫습니다.”
어린 의사가 방을 나서려 들자 푸딩이 문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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