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크 주교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팔이 들어 올려지며 드러난 손에는 화상 흉터가 그득했다.
“어찌 가브리엘 경의 죄가 자바니야 주교님의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자바니야 주교님께서는 믿음을 증명하신 분이신걸요.”
여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여인 자신과 그녀의 자식들은 믿음이 없으므로 끌려갔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여인은 성기사들의 손에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도 태양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 맞아. 가브리엘 경의 죄를 물었죠.”
충분한 답이 되었으리라 여긴 걸까, 마리크 주교는 여상스럽게 다음 질문을 찾았다.
“가브리엘 경은 악마를 불러냈답니다.”
그 말이 불러일으키는 반향은 무척이나 컸다. 무려 마리크 주교의 입에서 토해진 말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숨을 들이켰고, 또 다른 누군가는 탄식인지 기겁인지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인의 입도 다물어졌다. 자칫 한발 더 나아갔다면 겨우 산목숨이 도로 불길에 처박힐 뻔했다.
“우리 사이로 숨어든 악마는 시체에 들어가 되살아난 척 연기하며 태양신의 품에 안겨야 마땅한 고인의 삶을 능욕하였고, 고인의 부친마저 속였지요. 제 보금자리를 불살랐으며, 테네브레이 황녀의 눈을 가려 아버지인 황태자 전하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만들었습니다.”
황태자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딘가에서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가 천장에 매달려 뚝뚝 피를 흘리던 장면은 쉬이 잊히지 않았던지라 언급한 것만으로도 당시 상황이 생생히 되살아난 탓이다. 그리고 시체를 상기시켜 충동질한 구역질 나는 감정은 뒤이어 떠오른 인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
“로한슨이다.”
“에반젤린 로한슨이야.”
마리크 주교가 정답을 맞혔다는 듯 침묵했다.
안타깝게도 에반젤린을 옹호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호사퀸 공작은 약속한 대로 침묵했으며, 바알 공작은 제 아들을 설득해 냈고, 토텐 후작 부인의 품에는 아이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로한슨 백작은…. 로한슨 백작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구석에 숨듯이 앉아 있었다. 바로 옆에 후덕한 휘켈 자작이 로한슨 백작을 가리고 있었다.
휘켈 자작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몸을 비키자 로한슨 백작이 훤히 드러났다.
이러려고 참석을 요구했군. 난데없이 불똥이 떨어져 백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제타의 협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려면 무슨 증언이든 해야 했다.
“주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딸의 몸에는 악마가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장례를 치러주었는데도 숨이 끊겼던 시체가 다시 살아났지요. 저택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악마는 아비인 저를 속이려 들었고, 정체가 들키니 저택을 불태워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었습니다. 마리크 주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으나 결국 더러운 악마의 손아귀에 안타깝게 죽고 말았지요.”
로한슨 백작이 절절하게 말했다. 공작가의 영애를 꼬드겨낸 전적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혀가 퍽 유려했다.
길을 오고 가며 로한슨 저택을 감시하던 기사들을 보았던 사람들은 이제야 까닭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악마에게 입막음을 당했다가 주교님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 고얀…!”
앞쪽에서 노인의 노성이 들렸으나 로한슨 백작은 그냥 바람이려니 무시하기로 했다. 호사퀸 공작의 유산을 받는 일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미련 따윈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자신의 안위다.
“로한슨 백작님. 믿음을 택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진실을 밝혀주셔 감사합니다.”
마리크 주교가 만족해하며 백작을 치하했다.
로한슨 백작은 제게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쿵쾅댔다. 옆자리의 휘켈 자작이 참 잘하셨다며 로한슨 백작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백작은 마리크 주교의 앞이었기에 휘켈의 무례를 눈감아주었다.
반면 앞쪽에서는 호사퀸 공작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며 바알 공작이 곁에서 진정하라고 부채질을 하며 달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싫어하는 것이 비슷해 꽤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호사퀸 공작이 속으로 에반젤린을 찾았다. 자신이 또 그것을 찾게 될 줄은 몰랐으나 어서 튀어나와 저 망할 로한슨 놈의 얼굴을 뭉개줬으면 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분명 저 베일을 뒤집어쓴 여우의 수작임이 분명할 테지만.
공작의 속마음이 들렸다면 마리크 주교는 분명 억울해했을 것이다. 라파엘라나 호사퀸 공작만큼이나 마리크 주교도 에반젤린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라카’를 써서 에반젤린을 직접 초대하기까지 했는데 정작 에반젤린이 회장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잃어버린 개라도 찾고 있는 걸까? 잡아 온 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가둬놨으니 에반젤린이 찾기 어려울 텐데 말이다.
악마들은 성수에 지독히도 약했다. 아자젤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닿기만 해도 녹아내렸으며, 성수 근처에선 제대로 능력도 발휘해 내지 못한다.
특히 성수가 흐르는 대신전에서는 더욱. 신전에서는 고양이를 이용해 개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도 어려울 텐데 설마 신전의 모든 문을 열어보느라 늦는 걸까.
마리크 주교는 조금 더 에반젤린을 기다리기로 했다. 과연 이 눈앞에 놓여 있는 제물이 에반젤린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브리엘 경의 부정을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니 우선 희생제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실은 재판정에서 가리면 될 일이지요.”
사실 여태까지의 발언들도 제단 위가 아닌 재판정에서나 다룰 법한 내용이었으나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마리크 주교의 말에는 재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아 님.”
마리크 주교가 테네브레이를 불렀다. 테네브레이는 상석에서 내려와 제단으로 향했다.
일찍이 예행연습을 했었으나 역시 실전의 긴장감은 조금 달랐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건만 제단 위에 오르자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 때문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태양이 바로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감이 들었다.
“잔을 받으세요.”
테네브레이는 무릎을 꿇고 사제가 건네준 잔을 받들었다. 빈 잔을 치켜들고 있자 성수로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잔을 가져와 천천히 전부 마셨다. 전부 비운 잔은 다시 사제의 손에 들려진다. 성수를 머금는 이유는 기사들이 치루는 세례식과도 같았다. 왕의 역을 맡은 자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는 조치였다.
그다음으론 검을 하사받을 차례였다.
왕이 레아를 처단했던 기록에서 따와 희생제에서는 제물에게 서임을 하듯 검을 어깨와 머리에 가져다 댔다.
테네브레이가 사제에게 검을 받고 나자 마리크 주교가 테네브레이에게 속삭였다.
“검에 성수를 뿌려두었답니다. 살갗에 닿으면 피부가 녹아내릴 겁니다.”
마리크 주교가 한발 뒤로 물러나고, 테네브레이는 검을 잡아들고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목덜미에 겨누었다.
혈육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몇 번째더라. 황제도 황좌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오른 후에도 혈육을 죽여나갔던 걸 보면, 어쩌면 몸에 새겨진 문양처럼 황족들은 제 살을 파먹는 행위를 반복해대는 걸지도 모른다.
테네브레이는 심호흡을 한 후 칼을 겨누었다. 퍼렇게 선 날이 당장이라도 가브리엘의 목을 칠 듯이 떨렸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테네브레이는 살짝 힘을 주었다. 살이 베여 옷감에 피가 묻어나왔으나 가브리엘은 아프지도 않은지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테네브레이였다. 주교님의 말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예레미아 님?”
테네브레이가 의식을 계속하지 않고 그대로 굳자 사제가 테네브레이를 불렀다. 테네브레이는 마리크 주교를 한번 흘끔거렸다.
면사포로 가려져 마리크 주교의 표정을 읽어내릴 수 없기에 테네브레이는 멋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실망하고 계셔. 어떻게 하지.’
손이 잘게 떨렸다. 흔들림은 잡고 있는 검에까지 이어져 검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안 돼. 이러다 주교님도 날 버리실 거야.’
테네브레이는 초조해졌다.
머리가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환청이 말했다.
“테네브레이, 넌 쓸모없구나.”
그건 황제가 했던 말이었나? 아니면 아버지가? 아니면 마리크 주교님이 방금 꺼낸 말이실까? 마리크 주교가 테네브레이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에 테네브레이는 벼랑 끝에 몰린 듯 심장이 덜컹했다. 한계를 모르고 몸집을 부풀린 강박은 이제 실현되지 않을 상상에까지 이르렀다.
상상 속에서 주교님은 테네브레이를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가두었다. 그 곁에 아자젤이 테네브레이를 가만 지켜만 보고 있다.
굳이 감옥인 이유는 그것이 테네브레이가 잘 아는 훈육법이었기 때문이다. 성수를 부드럽게 발라주며 상처를 치료해주던 손길에 채찍이 들리는 모습이 선연했다.
주교님은 모질게 매질하고 나서는 테네브레이를 황궁에 버려두고 다시 찾지를 않았다. 테네브레이를 대신해 예레미아가, 오라토리오가, 가브리엘이 황위에 올랐다.
테네브레이는 거대한 황좌의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그건 안돼. 그렇게는 안 된다.
다행히 테네브레이에겐 아직 만회할 기회가 있다. 그렇지?
마리크 주교의 말은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했다. 테네브레이가 검을 놓지 않은 채 사제에게 다가갔다. 몸이 휘청였다. 검이 질질 끌리며 바닥을 긁었다.
사제가 흠칫 몸을 떨었다. 테네브레이는 사제의 손에서 성수를 강탈하듯 뺐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브리엘에게 성수를 확 끼얹었다.
“예레미아 황녀님!”
사제가 돌발행동에 놀라 테네브레이를 불렀으나 그녀의 귀에 바로 꽂히지 않았다. 제 이름도 아닌 걸 불러봤자 제정신이 돌아올 리 없었다.
가브리엘에게 검을 박아넣은 것이 아니라 성수를 뿌린 것은 마리크 주교의 말만이 머릿속에 남아 맴돌기 때문이다.
“검에 성수를 뿌려두었답니다. 살갗에 닿으면 피부가 녹아내릴 겁니다.”
테네브레이는 마리크 주교의 말을 되읊었다. 제 목소리의 위로 주교님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겹쳐졌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지. 이번엔 아예 성수를 뿌렸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왜, 왜 녹아내리질 않지?
그럼 다시 한번 해보는 거다. 이젠 아예 검을 박아넣는 거다. 테네브레이가 성수를 검에 뿌리려 들었을 때였다.
“예레미아 님.”
마리크 주교가 부르고 나서야 테네브레이가 반응했다. 마리크 주교는 한 손으론 어깨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검을 빼앗았다.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사제가 검을 받아 냉큼 뒤로 물러갔다.
마리크 주교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조금 이성을 되찾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타이르는 목소리가 차가웠다. 테네브레이는 오히려 물이 뿌려진 게 저 자신인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혼란에 빠진 테네브레이를 마리크 주교가 다독였다.
테네브레이는 손아귀에 넣고 굴리기 적당했으나 이렇듯 단점이 존재했다. 마구 조각난 것을 제 입맛대로 이어 붙였더니 조금의 충격만 받아도 다시 깨지기가 이토록 쉬웠다.
그러나 마리크 주교 역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왜 성수가 반응하지를 않지?’
조금 전, 일부러 가브리엘의 목에 검을 대어 시험해 봤을 때만 하더라도, 날이 닿자마자 피부가 녹아내려 갔다. 가브리엘은 저주받은 몸이나 그 기반은 악마가 아니라 성수에는 녹지 않는다.
고로 성수에 반응하는 걸 보고 내용물이 바뀐 것임을 확신했다. 생각하는 것 마음으로도 애절한 마음이 들끓는, 그 영애님의 수완이겠지.
에반젤린은 사라카가 바라는 대로 ‘가브리엘’을 뒤바꿔준 것이다. 마리크 주교로서는 환영하는 일이었다. 오히려 가브리엘이 악마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모두 마리크 주교의 바람대로였다. 에반젤린에게는 아자젤처럼 몸을 바꾸는 수족이 있으니, 가브리엘도 같은 방법을 써 구하리라 여겼다. 그리고 성수에 반응하는 피부를 보고 확신했다.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의 수족으로 대체되었다.
마리크 주교는 에반젤린이 제바람대로 가브리엘을 가짜로 바꿔치기 해 주었음에 안도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수가 들지 않다니? 혹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에반젤린이 성수에 무슨 수작이라도 해둔 걸까?
사라카는 성수를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더불어 에반젤린에게 빼앗겨버린 것을 처리할 차례였다.
마리크 주교는 테네브레이를 제단 아래로 이끌며 명령했다.
“테네브레이 님. 아자젤에게도 성수를 뿌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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